[인터뷰] 평화운동가 송강호

작년 3월 인터넷에 올라온 4분여짜리 영상 하나. 흔들리는 화면 안에서는 검은색 스쿠버 복장을 한 남자가 바다 속에서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연신 두들겨 맞고 발로 걷어차이고 있었다. 그를 폭행하던 이들은 해군특수부대 대원들, 물속에서 먼지가 나도록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 남자가 향하려던 곳은 구럼비 바위, 그리고 그가 원한 것은 단지 그 바위 위에서 아침기도를 드리는 것뿐이었다. 왠지 그의 이름과 얼굴이 낯설지 않다 했는데, 4년 전 쯤 ‘개척자들’이라는 단체가 주최한 개신교 기도모임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임이 끝난 뒤 공동체에서 직접 담근 된장 한 통을 선물로 건넸던 사람이 바로 영상 속 그 남자, 개척자들의 전 대표 송강호 씨였다.

ⓒ한수진 기자

그는 무엇 때문에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무릅쓰고 그토록 완강하게 구럼비 바위에서 올리는 기도를 고집했을까. 기도뿐이 아니다. 송 씨는 십여 년간 개척자들 회원들과 함께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아체 등 세계의 분쟁지역 곳곳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곁에 있는 삶을 움켜쥐어왔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건설 반대 활동에 뛰어든 2011년 1월부터는 레미콘 트럭 아래에 드러눕거나 구럼비를 둘러싼 철조망을 넘어뜨리는 등 ‘싸움꾼’을 자처하면서 한 번의 집행유예와 두 번의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지난 10월 6개월 동안의 미결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와 강정으로 돌아간 그를 만났다.

물 속에 처박히고 발로 차이면서도 기도하는 이유  

“기도는 저에게 절망의 장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틈새를 만들어 줍니다. 저는 그 길로 성큼 들어가는 거죠. 물론 앞으로 닥칠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움도 생겨요. 하지만 담담하게 기도하고 기도에 합당한 삶을 이어가다보면, 언제나 그렇게 길이 시작되었어요.”

송강호 씨는 하품 나는 강론 시간에나 들을 법한 은혜로운 말씀에 진심을 담아 상대의 가슴에 꽂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체구, 막 자라게 내버려둔 듯한 짧은 턱수염, 그리고 선하디 선한 눈빛을 가진 기도예찬론자는 개척자들과 강정에서의 활동, 평화운동가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기도에서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의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저에게 기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자격이나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만약 제가 신앙을 갖지 못했다면, 그래서 기도하지 못했다면 저는 결코 이런 삶을 살지 못했을 거예요.”

계기는 교회 청년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었다. 송 씨는 한 교회의 전도사로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가 목격한 교회는 청년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까보다 청년들을 어떻게 활용해 교회의 세력을 확장할지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런 교회에서 청년들이 의미를 찾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당연했다. 송 씨는 교회를 떠나려는 청년들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현장에 가본다면 신앙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방문한 곳이 필리핀이었다. 화산폭발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앞에 선 청년들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현실을 마주했다. 새로운 배움은 그들을 더 고통스러운 현장으로 이끌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터. 르완다 난민촌을 거쳐 소말리아와 보스니아에서 목격한 참담한 현실은 송 씨에게 전쟁과 기아의 현장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임을 가르쳤다.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 제주 강정마을 해안에서 '해군기지 결사반대' 깃발을 들고 있는 송강호 씨 ⓒ진달래산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은 자연재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쓰나미나 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아무리 많아도 1만 명, 2만 명인데 비해 전쟁은 기본이 10만 명, 100만 명이에요. 자연재해는 원망할 대상도 없지만, 전쟁은 사람에 대한 복수와 증오심으로 정신까지 이중으로 살상하죠.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을 유발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송 씨는 청년들과 ‘개척자들’을 설립하고 분쟁지역에 평화 캠프와 학교를 열었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증오와 복수심을 걷어내는 일은, 비록 더디지만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전이기 때문이다. 그가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실제로 전쟁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국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야 전쟁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평화라는 항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필리핀,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거쳐 제주 강정으로

“우리가 언젠가 반전(反戰) 활동을 하게 되리란 건 이미 처음부터 예정된 경로였습니다. … 전쟁 피해자들의 심각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전쟁 준비 자체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향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길이니까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전쟁터에서 십 수 년을 활동하며 단련된 개척자들이지만, 강정에서의 활동은 만만치 않았다. 이곳에서 송 씨는 전쟁 피해자들을 보듬는 치유자가 아닌, 공권력과 직접 ‘전쟁’을 치루는 당사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 ‘감히’ 공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곧 반정부의 낙인이 찍히는 걸 기꺼이 감수해야함을 뜻했다. 송 씨와 동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국에서 그저 좋은 일 많이 하는 착한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 실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등을 돌리는 이들이 생겨났고 후원을 끊겠다는 연락이 이어졌다. 물론, “겉멋에 취해 남들에게 시혜나 좀 베풀고 자족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진정성이 느껴진다”며 응원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숫자가 적은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송강호 씨는 “요즘도 심심찮게 비난을 많이 받고 있다”고 웃었다. 그러나 이런 비난 역시 자신의 진정성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송 씨의 여정을 들으며 기도가 그를 점점 더 거친 가시밭길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감히 들었다. 그러나 지금껏 옥살이도 마다않고 기도가 알려준 길을 고스란히 따라왔고 그 길에 함께 했던 청년들이 여전히 신앙 속에서 평화를 향한 길을 개척하고 있으니, 교회 대신 현장을 택한 20년 전의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저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만이 천국에서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따로 떨어져있는 게 아닌 거죠. (하느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손해도 보고, 고생도 하고, 고난도 겪는 그런 훈련과 경험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 면에서 지금의 신앙공동체들이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고 신앙으로 이끌지만, 그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2012 생명평화대행진 지리산 민회에 참석해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말하고 있는 송강호 씨 (오른쪽) ⓒ한수진 기자

요즘 그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깔대기처럼 한 곳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그래서 섬사람들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설득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미군 기지를 짓기 위해 선주민들을 강제로 내쫓았던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시아나 일본의 오키나와처럼, 군사기지가 들어서면서 환경과 주민들의 삶이 파괴되는 섬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고 강정마을도 그 중 하나라는 게 그의 이야기이다. 처지가 같은 사람들이 작은 차이를 뛰어 넘어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는 거다. 그는 겉만 번지르르한 국제 이벤트가 아닌 각자의 절실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물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끝까지 막아야겠지만, 설령 들어선다 하더라도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계속 되어야 한다던 그의 말이 그냥 으레 하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 말을 들은 문정현 신부가 “그러려면 내가 1억 원짜리 상을 하나 더 받아야 되겄네”하고 농담을 던지자 송 씨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만큼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감옥은 그를 6개월 간 강정마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평화를 향한 길에 대한 그의 확신은 좁쌀 한 톨 만큼도 가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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