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2]

피라미드? 내가 아는바에 의하면, 일전에 수단의 하르툼 북동쪽에서 보았던 고대 쿠시왕국의 메로에(Meroe) 피라미드 외에는, 이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는 없는데.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주의 깊게 차창 밖을 살펴보노라니, 그것은 인공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가 아니라 사막의 화산 지형이 배출해놓은 또 다른 형태의 자연 피라미드였다.

멀리서 얼핏 바라보면 여지없이 피라미드라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메마른 사막 여기저기에는 화산지형이 배출해놓은 크고 작은 자연 피라미드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단지 피라미디언(Pyramidion, 피라미드 꼭대기에 놓인 사각뿔의 단일석재)만 놓여있지 않았을 뿐, 영락없이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그 조형물은 참으로 놀라웠다. 아직 이집트의 피라미드와는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어쩐지 인공의 손길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이 거대한 자연이 연출해놓은 피라미드와 비교해본다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하는 기자(Giza)의 쿠푸왕 피라미드도 한없이 왜소해 보일 것만 같았다.

▲ 자연이 연출해 놓은 이색(異色) 피라미드 ⓒ수해

마치 어느 실험정신이 강한 설치 미술가의 야외작품전을 관람하고 있기라도 하는 양, 자연 피라미드 군락이 보여주는 놀랍도록 유연하고 조화로운 이미지를 찬탄하면서 내처 사막공로를 달려가노라니, 순간적으로 사막 저편에 물빛 잔잔한 호수가 나타나면서 그 위로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느닷없이 황홀한 모습으로 등장한 연보랏빛 호수 위로 헤로도토스가 말했던 에게 해의 섬들처럼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였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화산지형이 배출해놓은 자연 피라미드의 유려한 자태에 취해 열광하던 이들은, 이번에는 난데없이 나타난 사막의 오아시스를 보면서, 한층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당장 차를 세우라고 운전기사에게 무턱대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벽부터 머나먼 사막을 줄기차게 달려오느라고 한껏 지쳐버린 흑인운전사는 승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심드렁하게 관망하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차를 더욱 거칠게 몰아나갔다. 그러자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몇몇 성질 급한 청년들이 운전석으로 달려가더니, 강제로 차를 급정거 시켜버렸다.

차안에 타고 있던 대다수의 승객들은 은근히 모두 청년들의 난동에 쾌재를 부르면서 (운전기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정신없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황사가 휘몰아치는 사막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뛰쳐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금까지 눈앞에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던 물빛 잔잔한 호수와 그림같이 아름다웠던 에게 해의 작은 섬들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는 것이 아닌가.

▲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 ⓒ수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모두들 잔뜩 흥분하여서 발목이 움푹움푹 빠지는 모랫더미를 발로 퍽퍽 밀쳐내면서 무작정 사막의 지평선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자, 한동안 팔짱을 완강하게 끼고 짐짓 아니꼬운 표정으로 승객들의 행동을 노려보기만 하던 운전기사와 조수가, 이윽고 침묵을 깨고 큰소리로 말했다.

“친애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자자, 그만 진정들 하시고 잠시 저를 좀 보아주세요. 방금 여러분들이 본 광경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바로 신기루라고 하는 겁니다. 신기루는 대기의 온도차가 극심한 곳에서, 빛의 굴절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극히 단순한 착시현상입니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세요. 어디 호수와 섬이 있는지.”

날이면 날마다, 눈을 뜨자마자 아스완에서 아부심벨로 향하는 승객들을 싣고 이 길을 하루에 두 번씩 오가고 있다고 하는 운전기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승객들의 흥분을 이쯤에서 으레 등장하는 지극히 당연한 이벤트라고 생각하는지 너무나도 잘 준비된 말솜씨로 신기루에 관한 온갖 이론을 동원해 가면서 거침없이 열변을 토해 나갔다.

어느덧, 운전기사의 능숙하지만 불친절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유창하기 그지없는 설명을 다 듣고 난 승객들은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짐짓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차에 올라타더니 대부분 곧장 잠이 들어버렸다. 특히나 맨발로 오아시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숨을 헐떡거리며 되돌아온 우즈베키스탄 청년들은 차안이 떠나가도록 요란하게 코를 골면서 가장 심하게 곯아떨어져 버렸다.

느닷없이 출현한 신기루 현상으로 인해 한바탕 요란하게 시위를 벌였던 청년들과 미니버스안의 승객들이 대부분 잠이 들어버리자, 흙먼지만 어지러이 휘날리는 조용한 길을 달려가는 동안 내내 아까 순간적으로 포착한 신기루 현상이 과연 카메라 속의 필름에 정확히 담겨 있는지 궁금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공연히 불안정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잘못 작동하다가 자칫 실수로 필름을 날려 버릴까봐, 궁금증을 애써 가라앉히며 창밖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대추야자나무가 우거진 진짜 오아시스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 사바나 풍광 ⓒ수해

초목이 무성한 오아시스가 펼쳐지자, 간간이 열어놓은 창문으로 이국적인 향취를 가득담은 이름 모를 꽃향기가 사뿐히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서 발달하는 사나바 기후가 펼쳐지고 있는 이 일대가, 고대에는 목초지가 우거진 초원지대였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그것은 바로 이 사하라 사막 길프 케비르(Gilf Kebir)고원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유명한 원시 암각화 ‘헤엄치는 사람들(Cave of the Swimmers)’에서 그 충분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최근에 발견된 여러 가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4천년 경에 이 근방에서는 심각한 기후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로 급속히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초목에 물을 공급해주던 호수가 말라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하라를 떠나 물이 풍부한 나일 계곡으로 이주하게 된 것 이다. 사막의 주민들이 나일 강 계곡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지역의 지식과 신앙이 결합되었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 문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헤엄치는 사람들이라는 암각화 속에 등장하는 고대인들의 생동감 넘치는 영상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는데, 열어놓은 차창을 통해 귀에 익은 아잔(Azan,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퍼졌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처럼 사막 한가운데로 아득히 번져나가는 아잔소리에 퍼뜩 놀라 얼른 창밖을 내다보니, 도로변에 서 있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눈에 띄면서, 마침내 군데군데 인공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짙은 황토색 암산을 둘러싸고, 푸른 물살을 도도히 출렁거리는 나세르 호수의 진면목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좌악 펼쳐지기 시작했다.

▲ 나세르 호수 ⓒ수해

잠시 후, 이집트 전역에서 몰려온 수많은 차량들이 빽빽이 도열해 있는 나세르 호수 주변의 대형주차장에 미니버스가 정차하자, 사막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하는 낙타가 그려진 걸개그림들이 내걸린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하게 나타났다. 차에서 내리자 일단 먼저 나세르 호수 선착장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나서, 금속 탐지기와 엑스레이(X-ray)기기가 설치되어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들고 뜨거운 홍차를 한잔 마셨다. 홍차를 마시면서 매표소 옆에 자리하고 있는 아부 심벨 전시관에 들어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영상자료들을 둘러보다가, 하얀 물새 떼가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호수를 끼고 안쪽으로 한참 걸어가다가 보니 맨 먼저 신전의 도굴을 막기 위해 암산 측면에 눈속임용으로 만든 창문이 보이면서 서서히 거대한 신전의 전체적인 윤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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