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바오로딸 수도회 한국관구 총회 강의 전문 (2012년 11월 22일)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 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 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 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도종환, 길)

성바오로딸수도회 한국관구 측의 갑작스런 강의 요청에 무척 당황했다. 그리고 무척 감동했다. 2013년에 로마에서 열릴 총회 주제가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대담하고 예언적인 신앙으로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애덕’을 행합시다”였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신앙의 해’를 선포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요청한 것에 적절하고도 구체적으로 응답하려는 시도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복음화는 먼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요구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인지, 나아가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무늬만 ‘교회’인지 묻고 있다. 복음에 대한 내적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내적 확신은 ‘예언적 신앙’이며, 우리의 음성을 통해 선포될 뿐 아니라 애덕실천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한편 총회 의안집 초안에서는 성바오로딸수도회의 카리스마에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문화 안에서, 특히 오늘날 디지털 기술세계에서 단호한 의지와 전적인 투신으로 신앙을 이야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예언적 사명과 역사적 책임”을 자각한다면 “인류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더 깊은 내적 삶과 시대의 표징에 ‘영적 주의’를 기울이자고 촉구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가 총회에서 ‘신비와 예언’의 통합을 결의한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실상 신앙과 실천은 둘이 아니며, 참된 신앙은 참된 실천을 낳기 마련이다. 믿지 않고서야 행할 수 없으며, 행하지 않고서야 믿음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믿음이 사적 개인 안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고 상정한다면, 결국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이 믿음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다. 타인에게 전염되고 공감을 발생시키는 믿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며, 설사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지되더라도 ‘무늬만의’ 신앙에 머물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사실상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이며 소통과 공감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 한상봉 기자

커뮤니케이션하시는 하느님

최근에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노트커 볼프와 마티아스 드로빈스키가 지은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해방이다>라는 책은, 첫째 계명을 다루면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절대자와 다르다”고 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절대자를 ‘영원히 움직이지 않으면서 자존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자가 현상계 바깥에서 움직인다고 보았고, 플라톤은 나아가 역사의 원동력이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하느님은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생동하는’ 하느님에 비해 추상적이며, 하나의 원리나 이론에 불과하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이신론 역시 하느님은 도덕과 실천의 원리로 보았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역신이었으며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전능자였다. 그러나 다른 신들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는데, 일단 야훼를 섬기는데 값비싼 형상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노예들이 믿어도 좋을 만큼 저렴한 비용으로 섬길 수 있었다. 성전이 파괴되거나 사제가 살해되고 사방으로 흩어지더라도 야훼는 건재했다. 야훼신앙은 세상에서 거두는 성패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섭게 질투하는 신이었다. 그분은 여느 연인처럼 질투하신다. 당신 백성이 다른 신과 정을 통하면 하느님은 상처받고 슬픔에 잠긴다. 그분은 인간을 미치도록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내용은 ‘정의와 공평’이다.

당신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 애쓰시는 하느님은 그 백성이 당신께 받은 사랑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시계공이 아니다. 인간을 만들어놓고 태엽을 감은 다음,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개의치 않는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생동하는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은 신비에 머물지 않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신다. 소통하고 공감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인간은 야곱처럼 그분과 싸울 수 있고, 또 반드시 싸워야 한다. 밤새 그분과 씨름을 하였다면 그만큼 그분과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아무리 신심이 깊더라도,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더라도 이러한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분과 다투어(커뮤니케이션하여) 그분을 알기까지 ‘쉼’이 없기 때문이다.

바알신이나 여타 다른 신을 만족시키는 일은 하느님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수월했다. 고대의 신들은 야훼 하느님보다 실용적이었다. 고대의 신들은 그저 제물을 원했고, 성과와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분명한 인과율을 내세웠다. 그들을 숭배함으로써 건축, 관광 같은 경제활동이 살아났다. 그래서 유일신 야훼를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은장이와 조각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은 세상의 이익과 늘 거리가 있었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을 세워 제사를 올리고 제물을 바친다고 만족하시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은 그분 앞에서 늘 두렵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분은 근사한 선물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우리의 전부를 바라신다. 속마음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동반자요 연인인 인간에게 최고의 것을 바라신다. 까다로운 사랑이다.

 ⓒ 한상봉 기자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매체

지난 2000년이 시작되면서 귀농한 뒤로 제일 먼저 한 작업은 신학책을 모두 버리는 일이었다. 일부 남겨 놓았던 책들도 무주에서 경주로 이사 가면서 마저 처분했다. 그 틈에 ‘예수’도 ‘교회’도 떠나보내는 고별식을 치른 셈이다. 그때, 책을 화물차에 실어 보내면서도 마지막까지 떠나보내지 못한 책이 두 권 있었다. 구티에레즈가 쓴 <해방신학>과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나 역시 시대의 산물이라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열정으로 불타게 했던 ‘심장 같은’ 책이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 때는 결코 몸이 따라잡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혁명’이란 단어에 머리털이 빳빳하게 서곤 했다.

이제 다시 예수와 교회를 생각한다. 그리고 석사논문으로 서강대 신학대학원에 제출했던 ‘도로시 데이’라는 여성이 말한 대로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스캔들)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예수만 떼어낼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예수의 체현(體現)이 교회라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의 일부, 더 정확히 말해서 ‘또 다른 예수’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이해는 곧 교회에 대한 이해가 된다. 거꾸로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예수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발견한 예수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유대종교 안에서 평신도였음을 자각한다.

나는 예수를 굳이 ‘혁명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대 조류에 맞춰 예수를 ‘현자’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상 그분은 민중적 지혜를 통해 혁명으로 나아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현자로만 남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의 폭압적인 지배자라 해도 현자를 함부로 죽일만한 배포를 가진 이는 흔하지 않은 법이다. 또한 그를 혁명가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분에게서 ‘어떤 권력을 향한 의지’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민중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복적 싸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였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다. 유대종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제는 본인의 의식과 상관없이 신분상 ‘권력’에 가름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의 마음을 매만졌으며, 그를 만난 사람은 그 눈길만으로도 치유되었음을 ‘믿는다’. 양은 제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는 법이라고 한 그분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기억이 훗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낳았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자에 머물지 않고, 상처의 본질로 전진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 ‘하느님 없는 권력의 무자비함’이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고행의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으며, 거기서 무력함으로 무력한 자들을 섬기는 최고의 형식,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영성은 ‘주님에 대한 사랑’일뿐 아니라 ‘벗에 대한 사랑’이다. 그분은 가난한 백성들의 약점을 잡고 ‘주님’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저 섬약하고 슬픈 눈동자를 가진 이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들의 친구’로 죽었다. 여기서 우정이 발생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친구일뿐 아니라 연인이기를 자청하신다면, 그래서 연인의 눈높이에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다면, 가장 남루한 모습으로 그처럼 남루한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아파하시고 상처를 매만져 주셨다면, 마침내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주셨다면 그 사랑의 깊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예수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전달하시는 매체임을 발견한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볼 도리가 없다.

교회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낸 예수를 전하는 매체인가?

독일 파더본 대학의 신학자 오이겐 드레버만은 <우리시대의 신앙>이란 책에서 “나는 예수가 세상에 하느님을 전하려고 시도한 그런 방법으로 하느님을 믿었다”고 말한다. “예수가 믿은 하느님을 나도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드레버만은 “예수는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이 바로 ‘자비’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자비를 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믿음이 예수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 용기를 주었다.

▲ <십계명은 자유의 길이다>, 노트커 볼프/ 마티아스 드로빈스키, 분도출판사, 2012
예수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낙오된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사회에서 내팽개쳐진 이들에게 다가가고, 초대하며, 연대한다. 이를 두고 예수는 “아버지께서 그리 하시니 나도 그리 한다”고 전했다. 여기서 드레버만은 “하느님에 대한 증거는 오직 예수가 지금 이 땅에서 행한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날 뿐”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는 예수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실상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선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전달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통해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복음)을 전달코자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행업이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실패한 예수의 매체로 남을 뿐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다. 하느님나라가 임박했다는 다급한 전갈이다. 그러니, 지금껏 고단한 삶을 운명처럼 여기고, 비참한 일상을 업보로 여기던 이들에게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된다. 예수는 지금 여기서 무조건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는 미루어질 수 없는 복음적 요청이다. 왜냐하면 지금 잘나가는 사람들은 나자렛 예수의 복음을 서둘러 받아들일 필요가 없겠지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수수방관해도 살만한 세상이지만, 학대받는 이들과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지금 당장 구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이들을 대변해서 ‘복음’을 선포한다. “주님이 영이 내리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공생활 초기의 말씀은 그렇게 발설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슬퍼하는 자는 ‘장차’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전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예고했지만,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망설이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수의 예단이 틀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는 최후의 날이 유보되었기에 그동안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대신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진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며, 모든 사람을 초대하고, 모든 준비가 끝났고, 식탁 위에 식사가 잘 차려져 있으니 와서 먹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초대에 응하지 않거나 지체한다. 매일같이 잔칫상 같은 밥을 먹는 배부른 자는 예수가 초대한 잔치에 갈 필요를 특별히 느끼지 않는다. 그저 제 자리에 앉아 뭉개고 있는 게 속이 편하다. 교회도 때로 그러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예수 안에 드러난 하느님 또는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느님처럼 예수의 자리로 내려앉는 것이다. 예수처럼 가난한 이들의 자리로 내려앉는 것이다. 교회는 그동안 수많은 신학과 교설과 문헌을 통해 ‘스스로 하느님이심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선포해 왔다. 마침내 지상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십자가 위에 죄인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신 분을 주님으로 선포해 왔다. 교황마저도 자신을 지칭할 때 ‘종중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라고 전했으며, 미사 때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거듭거듭 탄원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련한 시골처녀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셨으며,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시다가,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거룩한 피를 뿌리셨기에, 그 덕분에 우리는 예수가 받았던 삶의 방식을 다시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여기서 고생은 예수가 하고 행복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누린다. 하느님께서 버렸던 왕관을 교회가 다시 집어쓰고, 예수가 버렸던 호칭을 교회에서 다시 부른다. 바오로가 폐했던 율법을 교회법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예언자들이 폐했던 제사를 교회가 다시 봉헌한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예수의 제사상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들은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갖추어 입고 성전을 짓는다.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구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앙과 실천의 괴리감, 신자들만의 문제인가?

우리는 미운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반면에 연인들은 서로 말을 섞고 살을 섞고 싶어 안달한다. 하느님 역시 인간에게 말을 섞고 살을 섞고 싶어 하셨다. 당신이 인간에게 섞은 말씀들은 성경으로 남아 있고, 당신이 인간에게 섞은 살은 성체성사 안에서 기념된다. “이는 내 몸이다. 받아먹어라.” 마음이 간절하면 행동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러니, 중요한 건 마음이다. 신앙이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신앙의 해’를 새삼스레 선포하신 것이다. 신앙이 위기라는 뜻이다. 신앙의 내용을 모르고, 알더라도 실천하지 않기에 위기다.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지 않던가.

▲ 교황청에서 발간한 가톨릭교회교리서
신앙의 해를 맞이하면서 지난 10월 내 수많은 메시지가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말씀’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구체적인 위기대처법으로 제시된 것은 <가톨릭교회교리서>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읽으라는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가 여기에 첨가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 가운데 어느 것도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처음부터 “주교들을 위한”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더불어 교리서를 편찬하려는 이들과 사제, 교리교사들을 위한 것이지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만든 책이 아니다. 그래서 신학적 전문지식이 따르지 않는 한 읽어도 모를 ‘말씀’ 뿐이다. 그 낱말 하나하나가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신중하게 선택된 것이다. 즉, 일상용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신자들은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이다. 어차피 알아듣기 어려운 탓이다. 이 어려운 내용을 그동안 교회는 줄곧 방치해 왔다. 그나마 약식으로 간추린 예비자 교리서에는 정작 신자들이 살면서 마땅히 체득해야 할 <가톨릭교회교리서>의 3편 ‘그리스도인의 삶’ 부분을 다루지도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교황청에서 ‘신앙이 위기’라면서 권고하자, 서둘러 교회문헌에 대한 독서열풍이 불어 닥쳤지만, 보나마자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심지어 사제들도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문헌을 신자들이 감당할 턱이 없다.

학교에서 교수가 수업 시간에 횡설수설하는 것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이론을 가르쳐야 할 때다. 이처럼 사제들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내용을 신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교회 안에서 교리를 가르쳐야 하는 사제나 들어야 하는 신자들이나 피차 ‘벙어리 냉가슴’일 것이다. 사회교리의 경우에는 한국교회에서 신학교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사제평생교육원에서 사회교리를 힘써 배우려는 사제도 별로 없다. 사제들은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도 없고 소용을 느끼지 않으며 그저 쉬고 싶을 뿐이다. 사실상 성직자들에게 ‘보수교육’은 없다.

하느님을 전달하는 결정적인 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매체가 교회라면, 교회의 가르침을 결정적으로 전달할 매체는 어쩔 수 없이 사목현장에서 일하는 사제들이다. 아니면 교리교육을 일부 담당하는 수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능력이 없다면 거기서 전달과정은 멈추고 만다.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교회 가르침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 교회 현실에서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사제들이 ‘신앙적 확신’을 지닌 사목자라기보다 ‘직업인’으로서, 칼 라너의 표현대로라면 ‘종교 공무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 교회문헌을 떠나서 생활적 증거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재구성’하는 것 역시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의 세밀한 가르침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성경과 전례, 그리고 자신이 마주치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생활태도를 정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교회에서도 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가톨릭교회의 ‘신앙의 위기’는 ‘사제들의 위기’다. ‘수도자들의 위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법적으로 그들에게 사목적 권한을 일부 위임한 ‘주교들의 위기’다.

“이것이 교회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호소하는 교회

참된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했던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가 되려고 자청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물론 주교들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희망의 근거가 남아 있다. 대부분의 주교와 사제들이 ‘새로운 복음화’를 거론하지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저 정부에서 시달된 지침을 처리하는  행정공무원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은 그들이 이 상황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이 ‘새 복음화’를 자신의 절박한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신앙체험이 갈릴래아를 떠돌던 예수를 닮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가 ‘새로운 복음화’를 절박하게 호소하는 주교로서 두드러진다. 강우일 주교가 한국 주교회의 의장이라는 점은 그래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강우일 주교가 최근 급박하게 ‘신앙의 재구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적 태도에 깊은 감화를 받은 탓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밖에서 주어진 자극일 뿐, 강우일 주교 자신의 신앙적 확신이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만사를 뛰어넘어 ‘예수’에게 주목하는 태도다. 이럴 때 예수라면 어찌했을까? 예수는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시선을 돌렸을까? 예수는 실상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사셨을까?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스승 예수와 운명을 나누어 가져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광뿐 아니라 십자가도 역시. “만일 예수가 나였다면…”하고 묻지 않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교들과 사제, 수도자들이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전례를 행하고, 성체조배를 하고, 묵주기도에 열성을 드리지만, 정작 성경에 드러난 예수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자신의 생각에 대해 개별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분에게서 해답을 찾지 않는 신앙이라면, 아무리 수천만 단의 묵주기도를 봉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과 견주어 생각하지 않는 한, 그 기도가 나와 하느님, 나와 예수와의 관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우일 주교는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구원이란 정신적, 영적인 구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 정신적, 영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도 없었다”고 전했다. 강 주교는 “교회가 이어받은 예수님의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사랑”이라며,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강우일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니”라면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의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예수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나 개인의 마음의 평화,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고민하고, 예수님과 함께 참된 의를 실천하고, 예수님과 함께 연민과 수난의 길을 걷는 고달픈 여정”이기에 “안락하거나 편안한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강우일 주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피곤함과 도전을 마다하고, “교회를 생각이나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인생 ‘동아리’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수많은 종교 단체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만일 오염되고 타락하고 폭력의 도가니라고 할 이 세상 한복판에서 씨름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로메로 대주교와 신앙적 확신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의 대주교인 로메로가 오후 6시, ‘하느님의 섭리’ 병원의 작은 성당에 도착했다. 그가 성찬의 전례 도중에 막 빵과 포도주를 올릴 참이었는데, 조준된 총탄이 날아와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피는 제단 뿐 아니라 그가 축성하려던 성체와 성혈에까지 튀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둘러선 이들에게 속삭였다. “하느님께서 자객들을 용서하시길!”

▲ 로메로 대주교는 신앙적 확신에 따라 독재정권에 맞서 예언자의 삶을 살다가 제단에서 피흘리며 봉헌되었다.

하비 콕스는 <종교의 미래>라는 책에서 “로메로의 삶의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라고 적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신조와 성직계급의 종교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새로운 신앙으로 진입하는 그리스도교 탄생의 성육신이라고 전했다. 하느님의 약속이란 ‘정의와 공평’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체현한 나자렛 예수의 신앙을 다시 발견했다.

로메로는 1917년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나 정신적 총명함과 상위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심을 가진 학생을 양성하기로 유명한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공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구원자’라는 의미의 엘살바도르에 돌아온 로메로는 교구간 신학교 학장으로 일했고, 중앙아메리카 주교회의 총무를 맡았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게서 산살바도로의 보좌주교를 거쳐, 1977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가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은 것은 친구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루툴리오 그란데 신부가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루툴리오를 따르던 신자들은 “주교님은 루툴리오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편에 서시겠습니까?” 물었다. 이때 로메로 대주교의 전향이 이뤄졌다. 예전에도 들었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독재정권의 살해와 투옥, 폭행과 유괴가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우리시대에 다시 ‘예수’를 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강론을 통해 경찰과 군대에 ‘멈추라’고 경고하고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처럼 권력에 의해 지목당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론을 통해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민중의 삶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박해받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던 그는 급기야 권력에 의해 제단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의 변화가 단순히 친구 루툴리오 신부의 죽음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오해다. 이에 앞서 이 사건의 의미를 하느님께 물을 수 있었던 로메로의 신앙이 있었다. 친구의 죽음 때문에 ‘욱’하고 내지른 것이었다면 예수처럼 죽음에 이르도록 신실할 수 없다. 신앙은 전적인 것이다. 이처럼 로메로는 예수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전달한 매체가 되었다.

우리는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사건을 통해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계시를 ‘특별하다’고 느끼는 자에게서만 변화가 시작된다. 사실 성체성사 중에 성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제의 축성이 성체를 영하는 자의 열린 마음과 만났을 때 발생한다. 요깃거리도 되지 않는 면병이 위대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묵은 인간이 가고 새로운 인간을 입는 순간이다. 이 자리에서 2천 년 전 죽었던 예수가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깨어난다. 이게 부활이다.

시대 진단과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

바오로딸수도회 2013년 총회 의안 초안에서는 무수히 반복적으로 ‘인터넷시대’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인터넷시대라 함은 “우리처럼 세계화 된, 서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인터넷 덕분에) 전체적으로 더 개방되고 더 소통하지만, (오래된 이데올로기의 종식으로) 더 불확실하기도 한 세계, (실제적인 사회주의와 다른 독재체제의 몰락으로) 더 자유롭지만 (테러리즘과 타인을 향한 무관심, 극적인 경제위기 등으로) 새로운 두려움에 더 갇힌 세계”라고 전한다.

▲ 성바오로딸수도회는 6년에 한번씩 시대의 징표와 수도회의 비전을 찾아가는 총회를 열고 있다. 사진은 제10차 총회 의안집이다.ⓒ한상봉 기자
의안은 먼저 인터넷 환경으로 인해 전 세계 누구나 쉽게 관계 맺을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한 폭력, 그리고 삶의 방향타를 잃어버린 ‘인류의 불안’을 표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은 더욱 교묘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고, 대처방법 역시 분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대상황은 절망적’이다. 분명한 적이 있어야 분명한 저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권태’와 ‘무기력감’이다.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없다는 판단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

종교 현상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무력감’이다. 한국교회의 경우에 성직주의, 중산층화, 노령화 등을 제일 큰 문제로 꼽는다. 덧붙여 세계교회 차원에서는 교황중심주의, 성직자들의 도덕불감증(아동성추행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성사제 문제 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하느님 체험의 부재’와 ‘교회는 변화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무력한 신앙이 놓여있다.

세계 안에서 교회는 예전처럼 발언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신앙생활은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상당 부분 ‘개인적인 일’이 되었다. 이른바 취미생활 수준으로 전락한 신앙생활, 그리고 사교장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교회, 아직 남아있는 기복주의의 온상, 그리고 그 안에서 ‘공무원처럼’ 보장된 정년을 누리는 성직자들, 팬클럽 운영을 통해 사적 재산을 모으는 성직자들의 투자처 정도로 남아 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할 자신도 없고’, ‘한 때 해봐도 안 되고’, ‘해볼 흥이 나지 않는’ 복음적 열정이다. 여기서 ‘예수’는 신조 안에만 머물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기득권을 버리고 ‘투신’할 용기가 사라진다. 가장 결정적인 것을 포기하면 ‘눈앞에 놓인 이득만’을 찾아서 움직이기 마련이다. 성무집행은 ‘기본’만 하고, 나머지는 ‘여흥’을 즐기는 방향으로 간다.

덧붙여 인터넷환경에 대해 말하자면,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을 혁명적으로 단축시켜 주었다. 정보의 대량공급으로 감출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진실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인터넷 환경으로 신비의 공간이 사라졌다. 여기서 신비의 공간이란 ‘쉼’의 공간이며, ‘기도’의 공간이다. 하느님과 만나는 공간이며 시간이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아이를 양육하면서 인터넷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극장에 가는 등 여러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태스킹 인간’이 나타난다. 이들에게 직접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면서 우정을 나누는 방식은 시간낭비로 취급된다. 영양이 좋은 현대인은 평균수명이 45살이던 중세인에 비해 곱절이나 오래 살게 되었지만, 언제나 시간부족을 경험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일에 성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사제의 감사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뜨개질이라도 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TV로 방송미사를 보는 게 차라리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안식일과 주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 계명은 단순히 휴식을 취하라거나, 숨을 돌리라거나, 조깅이나 수영을 하라는 계명이 아니다.” 최근 대형마트에서 일요일 영업을 두고 논란이 빚어진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인에게 주일은 그저 쇼핑하기 좋은 날이다. 그러나 유다교의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날이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것을 되새기는 날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며, 신자들이 모여 성찬례를 올리는 날이다. 즉, 주일은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과 예수의 초대에 응답하는 날이다. 이를 두고 이 책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나는 너의 주 하느님이다. 나는 너에게 일상을 멈추고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네 생애가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고, 네 삶의 리듬을 찾기 위함이다. 나는 너에게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너의 삶이 일과 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눈앞의 이득과 무관한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는 너에게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기 위험이며, 미사 중에, 하느님과의 만남 중에 너 자신에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일은 이처럼 ‘노동을 멈추고 영혼을 회복하는 날’이다. 그러나 인터넷 등장으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해체는 주일마저 가상현실 속에서 해체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인터넷이 부정적 요소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의 개방성, 정보 접근성은 독재정치를 견제하고, 사람들 사이에 신속하고 손쉬운 소통을 가능케 한다. 원거리에 있는 이들조차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시킨다. 교회는 인터넷 시대를 임의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 요소를 극대화시킬 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부정적 측면을 인식하면서도 ‘가치중립적인 매체’를 복음적 매체를 바꾸어 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 수도회의 홈페이지가 그러하듯이, 수도자들은 새로운 문화현상에 대해 주춤거리며 회피하고 책임을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것도 아니면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이 역시 우리 신앙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신앙적 확신이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매체이며 환경일 뿐이다. 환경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모습을 바꾼다.

신비와 예언의 통합을 위하여

헨리 나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우리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제시한다. 헨리 나웬은 이를 ‘신비’와 ‘혁명(예언)’의 통합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웬은 신비와 혁명을 ‘인간이 지닌, 같은 초월적 경험양식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신비에 잠기거나 혁명가로 나서게 만든다는 뜻이겠다. 그는 회심을 ‘혁명의 개인판’이라고 확신하며 “진정한 혁명가는 모두 그 마음속에 신비가이기를 요청받고 있으며, 신비적인 길을 걷는 사람은 인간사회의 환상적인 속성을 벗도록 소명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신비가는 누구나 자기성찰을 통해 병든 사회의 근원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의 비평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혁명가도 새로운 세계를 위한 투쟁 가운데서 반동적인 공포나 그릇된 야심과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인 상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우리를 ‘무력한 신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수도자들에게는 ‘관상’과 ‘활동’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많이 언급되어 왔지만, 신비와 혁명의 통합이라는 문제는 관상과 활동의 ‘방향’을 내포하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징표와 관계가 깊다. 신비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침범할 수 없는 중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예언)은 그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신비가가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사만인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이 특별히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망설일 틈이 없이 투신하게 된다. 연인을 향한 ‘두려움 없는 사랑’이 그를 현장으로 내닫게 만든다. 무력한 신앙은 그렇게 이슬처럼 말라버리고 생동하는 신앙으로 거듭난다.

▲ 헨리 나웬
그러나 헨리 나웬은 일상 속에서 신비와 혁명의 시공간을 구별하지 않는다. 관상과 실천의 자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 그분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상에 깃든 그분의 얼굴을 ‘보는 것’이며, ‘볼 의향이 있는지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나웬은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한 젊은 탈주병이 적의 눈을 피해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갔다. 그 마을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탈주병을 찾으러 온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탈주병의 행방을 묻자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병사들은 동이 트기 전에 탈주병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마을사람들을 모두 죽게 할 것인가. 사제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 자기 방에 들어가 동이 트기 전까지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어 사제는 성경을 넘기다가 우연히 이 구절을 발견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

사제는 성경을 덮고 이내 병사들을 불러 탈주병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탈주병이 끌려가 살해당한 뒤, 마을에서는 사제가 마을사람들을 구했다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사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슬픔에 잠긴 채 자기 방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천사가 사제에게 나타나 “당신은 무엇을 하였소?” 물었다. 그는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천사는 “당신은 메시아를 넘겨준 것을 모르는가?” 다시 물었다. 그 탈주병이 메시아인줄 어찌 알겠느냐는 사제의 변명에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는 대신에 단 한 번이라도 그 소년을 찾아가 그의 눈을 응시했더라면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았을 텐데.”

상념에 빠지는 일보다, 묵상에 잠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의 현장’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일이다. 시몬 베유 같은 이는 중국에서 군벌들 사이의 내전으로 죽어가는 인민들의 참상을 다룬 신문기사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능력을 타고난 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직접 가서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참한 처지에 놓인 목숨들이 소문이나 기사나 사물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여겨져 사랑하게 될 것이다. 가슴 아프게 될 것이다. 끌어안아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 강정에서 왜 사제들이 그토록 애달파 하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이미 고여 있는 사랑을 길어 올릴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랑하라, 그리고 뭐든지 하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을 모든 논쟁을 거슬러 받아들일 것이다.

▲ 성바오로딸수도회 여주 사도의 모후 집 성당 십자고상. ⓒ 한상봉 기자

그분을 만나러 가자, 내 서늘한 눈매로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로 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느님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분을 면전에서 뵙기 위해서다. 헨리 나웬은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이런 예화를 들려준다.

랍비 여호수아 벤 레비는 랍비 세메온 벤 요하이의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예언자 엘리야를 찾아와서 물었다.
“메시아는 언제 오십니까?” 
“가서 그분에게 물어보시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상처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그분은 도처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알아볼 눈매를 지니고 있냐, 는 것이다. 20년 넘게 우정을 맺어온 김해자 시인의 시를 잠깐 접해 보자.

영아다방 앞에서

-김해자

퇴근길 다방 입구에 쪼그려 앉아 너를 기다린다
누구는 부평역에서 도장 파는 걸 보았다 하고
주안에서 찌라시 돌리는 걸 보았다 하고 또 누구는
국수를 잘 말던 노모와 함께 인절미를 파는 걸 보았다 하는데
교통사고로 고장난 기억을 이끌고 아는 얼굴마다 찾아다니던 네 흉터투성이 얼굴,
포장마차 흐릿한 불빛 새로 바로 엊그제인 듯 말갛게 비쳐온다
감방에서 배운 기술 들고 찾아다니던 그해 초겨울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공장문
공단 담벼락 끼고 걸으면 치욕처럼 배가 고파왔다던,
내 눈물 사이로 흉터는 도드라지고
분칠할 학력도 주변머리도 없던 네게 쏟아지던 겨울비,
딱지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 게워내며
오늘도 비는 내리고 너는 끝내 오지 않고
석달 째 농성 중인 건너편 산곡동 성당에는
빛바랜 플랜카드
만장처럼 휘날리고 있다


구겨진 생을 펴다

-김해자

저마다 하루치의 수고를 닫아 건
캄캄한 골목길에 오늘도 우성세탁소 안은 환하다
열린 문 사이로 스팀다리미 뿌연 열기 줄지어 승천하고
세탁통은 둥글게 돌아가는데
몸에 맞지 않는 옷 덮고 미싱은 구석에서 말없이 존다
문득 다림판 앞에 서서 구겨진 허물
정성껏 펴는 아저씨 얼굴이 성자 같다
그의 등 뒤로 활짝 펴진 생들이 천정 가득 하늘거리는데
무거운 짐을 펴는 그의 등은 누가 펴줄까
하늘을 보니 별빛 몇 모여 세탁소 간판을 걸었구나

“수고하고 구겨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내가 너희를 활짝 펴 주리라“

헨리 나웬은 이어 탈무드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랍비 여호수아 벤 레비가 메시아에게 가서 말했다. “나의 주님이시고 스승이신 당신께 평화가 있기를.”
메시아는 대답했다. “레비의 아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가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라고 묻자,
“오늘” 하고 그는 대답했다.
랍비 여호수아가 엘리야에게 돌아가자, 엘리야는 “그가 당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디까?”하고 물었다.
“그는 정말 나를 속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오늘 온다’고 대답했는데,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말했다. “그가 당신에게 말한 것은 ‘오늘 너희가 그의 말씀을 듣게 되면’(시편 95,7)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나를 떠보았다."(시편 95,7-9)

우리의 모든 세포를 열어 그분을 알아 볼 시선을 간직하는 삶, 그것만이 우리가 하느님의 매체로, 예수의 매체로,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매체로 살아갈 방법을 던져준다. 복음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다만 우리 눈이 흐려져 복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엉거주춤한 자리에 대한 미련 때문에, 또는 게으른 기도 때문에, 결국 나 자신 고유한 길 안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 까닭에 우리는 스스로 그분의 매체임을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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