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 영화] 조성희 감독, 박보영 · 송중기 주연, 상영 중

 
“500만 명을 돌파한 첫 번째 멜로영화”라는 기사까지 확인한 터에 <늑대소년>(조성희 감독) 이야기를 시작하자니 겸연쩍어집니다. 주연(酒宴)에서 김빠진 맥주잔을 권하는 일 같고 예식이 끝난 뒤 도착해서는 축의금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행동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용기를 내서 쓰고 있습니다. <늑대소년>이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한 느낌을 주는 영화라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이미 관람을 마치신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영화 <늑대소년>은 지배와 예속의 판타지 속에서 사랑의 낭만성을 믿었던 시간과 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 보신 분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낯익은, 멜로물의 교과서적 전개가 아닌가 고개를 젓는 분이 분명 계실 터이지요. 이러한 반응을 고려해서인지 감독은 능청스럽게도 주인공의 이름을 순희와 철수로 짓고 시간대를 1950년대 후반으로 되돌립니다. 이 영화의 독창성은 이 풋내 나는 관계를 인간과 늑대의 탈을 쓴 개의 모습을 통해 재현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폐병 앓는 소녀와 늑대소년의 사랑 이야기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의 늑대소년 철수는 배우 송중기가 연기를 합니다. 헐크처럼 분노에 차면 변신이 가능한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이 변신이 과학적 연구의 산물임이 영화 중반에서 밝혀지지요. 한편 박보영이 연기한 순희는 폐병을 앓는 소녀입니다. 가족이 강원도 산간 마을로 이주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입니다. 멜로의 주인공답게 피부는 백짓장처럼 하얗고 달리다가 쓰러질지언정 피를 토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의 심각성을 증발시키면서 이야기는 그렇게 예쁘게 흘러갑니다. 또한 이 여주인공은 당차면서도 소녀다운 신경질과 결벽증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지요. 순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철수는 그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늑대들과 함께 사육장에서요. 그러다가 순희 가족에게 발견되고 문명의 세례를 받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영화는 다양한 텍스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늑대인간과 개-인간이라는 유사성 때문에 곧잘 비교되는 <브레이킹 던 partⅡ>와 <나는 펫>을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지요. 저는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드클리프에서 시작되어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와 마이클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로서 이 영화를 읽었습니다. 이들은 남성의 순애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과 다르게 <늑대소년>이 여성을 특화된 관객층으로 소구하는 여성 영화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입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에서는 남성 멜로드라마라는 장르가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통상적으로 멜로드라마가 내러티브의 중심인물이 여성이고 여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 여성적 장르로 규정되었던 것과 다르게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남성 멜로에서는 “남성이 연애를 통해 성장하고, 사랑에 헌신하며, 사랑의 현실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을 하는” 주체로 제시되지요. <봄날은 간다>, <질투는 나의 힘>, <말죽거리 잔혹사>, <편지>,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너는 내 운명>, <중독>, <번지점프를 하다>, <소년, 천국에 가다> 같은 일련의 영화들이 이에 속하는 것으로 거론됩니다.

 
<늑대소년>의 철수도 남성 멜로의 계열에 속하는 인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그에 대한 헌신으로 50년 가까운 시간을 견딘 존재입니다. 문제는 현실적 장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영화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고독과 싸우며 상대를 기다리고, 한편으로 말과 글을 학습하고 기타(guitar) 조각을 이어붙이고 식물을 기르는 과정 역시 초인적인 극복의 몸짓이라 해석할 수 있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늑대소년>을 남성 멜로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장 크게는 철수가 말을 못한다는 점에서 기인한 수동성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철수가 항상 수동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독심술이라도 하는 듯 순희가 발하는 무언의 요청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행동이 그를 더욱 애완동물처럼 여겨지게 했는지도 모르지만요.

보편적인 사랑과 실패의 드라마가 모두의 심장을 울리는 이유

귀갓길 지하철에서 현아의 ‘군림 춤’을 누군가의 어깨 너머로 보고는 오늘날 여성들이 원하는 바가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군림과 지배가 어디 쉬운 건가요. 사랑이 아무리 절실한 것이라 해도 타인을 지배한 만큼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인간적 존재란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자유를 함께 말하기 시작할 때 관계가 비로소 성숙되는 것 아닐까요.

소울메이트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 그러한 사람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을 것이라는 배타적 낭만성이 사랑을 실체보다 더 위대하게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생의 마지막까지 지속되는 일은 인간에게 극히 드물게 허용되는 기적 같은 일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늑대와 같은 동물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소년(녀)성이 따라준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일이겠지요. <늑대소년>은 그러한 사랑과 실패의 드라마입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 영화가 모두의 심장을 울릴 수 있는 보편적 서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높은 예매율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겁니다.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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