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요한 18,33-37

오늘 복음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내용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유대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명이라고 답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아를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총독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 흥미가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유대아를 무사히 통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시선을 끌기 위해 로마 통치에 저항하는 정치범, 곧 유대인들의 왕을 사칭한다는 죄목으로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에 반발하는 식민지 주민을 처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한 후,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목을 써 붙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로마법에는 식민지에서 사형 언도와 집행은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는 빌라도의 동의와 협조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증오하던 총독에게 그를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분을 없애기 위한 편법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빌라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로 당신의 부하들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지 않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왕국에서는 부하들이 싸우고, 빼앗고, 점령하여 왕을 옹립하고 보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는 그렇게 싸우고 빼앗고 점령하여 권력자를 추대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났고, 예수님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입니다.

우리는 먼저 왕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과 영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 아직도 왕이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왕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왕은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은 사라져가는 그런 왕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에게 왕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땅 끝에서 땅 끝까지”(시편 2,8) 다스리게 해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의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돌아가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빌라도에게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서에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그 여인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8,11)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8,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8,32)고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권력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짓밟는 일과, 미움으로 사람을 버리고 죽이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자리 잡은 동물적 본능과 미움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는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인간의 참다운 자유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를 실천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읽어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 우리를 위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십니다.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나라는 힘으로 혹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판단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자유를 실천하는 신앙인이 따라야 하는 왕이십니다.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하다고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주변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아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괜찮은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진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이 세상의 괜찮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남이 보아서 괜찮고, 내가 보아서 훌륭하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언하신 진리가 삶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셔서 인간 본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벌을 주고,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친 그만큼 용서하고 구원하신다고 유대교는 가르쳤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큰 권한을 주셨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율법의 이름으로 죄인을 만들었습니다. 장애인, 병든 이, 가난한 이, 실패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이 버린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그런 가르침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 진리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하들을 희생시키며, 자기 스스로는 명예롭게 군림하는 이 세상의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인류 역사 안에 ‘내어 주고 쏟는’ 삶의 진리를 발생시켰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나라의 일을 배우는 사람에게 왕이십니다. 그 나라에는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실천하는 헌신과 봉사가 기본 질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진리는 지배와 억압이라는 이 세상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참다운 자유를 살게 해 줍니다.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을 성찬에서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하느님의 자유를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으로 나타낸 하느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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