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아주 오래 전 MBC에서 방영했던 <수사반장>의 한 에피소드였다. 그때 나는 어렸다. 몹시 어렸다. 그날 저녁 부모님은 일이 있어 부부동반으로 외출하셨고 혼자 집을 봤다. 그 회 사건의 주인공은 고교 시절 애틋한 사이였던 남녀 대학생이었다. ‘합격 후 만나자’는 약속으로 잠시 헤어졌다 대학생이 돼 데이트 하는 모습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둘 다 수줍어 어쩔 줄 모르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게 여느 청춘물 같았다. <수사반장>스럽지 않아 계속 봤다.

 
그런데 둘이 동네 뒷산을 걷던 중 깡패들이 나타났다. 구타당하던 남자는 여자를 두고 도망치며 “사람들을 불러오겠다”고 했다. 이윽고 남자가 동네사람들을 모아 다시 나타났을 때, 여자는 커다란 나무 밑에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옷매무새도 단정했고 머리도 헝클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다만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남자는 깡패들이 사라지고 여자 혼자 남은 그 장면에 절망했다. 이후 여자는 입원을 거쳐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별 외상이 없어보였던 그녀가 왜 입원을 했는지도 그땐 몰랐다.) 남자는 날마다 병원으로 집으로 여자를 찾아갔으나 ‘돌아가라’는 그녀 어머니의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학교 앞으로도 찾아갔지만 그녀는 한 번도 남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입도 닫았다. 남자는 이후 수년 동안 그 깡패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깡패들을 찾아낸 날 그는 살인자가 되었다.

남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살인죄로 체포돼 수사반 형사들 앞에 선 그의 당당하고 의연하던 표정. 비겁했던 자신을 그제야 내려놓은 후련한 표정의 그와, 사건 후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보며 울던 여자친구. 연민과 씁쓸함으로 말을 잃고 서 있던 최불암 수사반장. 나로서는 이해할 순 없지만 뭔가 대단히 비참하고 비극적인 그 분위기가 무섭고 가슴 아팠다. 때마침 귀가하신 부모님을 붙잡고 엉엉 울었던 게 기억난다.

커서야 알게 된 그 뒷산 나무 장면의 ‘메타포’는 강간에 대한 암시였다. 극히 짧은 장면 처리였지만 분명했다. 그게 그날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핵심 사건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어렸을 땐 그런 장면이 드라마에 숱하게 등장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도, 남자의 애정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여자는 극히 수동적이었다. 그게 일반화된 남녀구도였다. 그 시절이 얼마나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딸들을 지키지 못한 서러운 역사가 그런 식의 이중 억압으로 왜곡되기도 했을 것이다.

30년 전을 떠올리게 한 <보고싶다>의 시대착오적이고 낯선 폭력

첫사랑 멜로를 표방한 MBC 수목극 <보고싶다>(극본 문희정, 연출 이재동)가 비난에 휩싸였다. 방송 3회에서 15세를 연기중인 남녀 아역배우를 통해 성폭행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소녀는 마약에 취한 불량배에게 겁탈 당하고, 결박당한 소년은 첫사랑이 무참히 짓밟히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며 울부짖는다. 입은 검은 테이프로 봉해진 채로. 이 장면은 제작진이 공들여 오래오래 찍었는지 꽤 오랫동안 나왔고 묘사도 구체적이었다. 절망하는 소녀의 얼굴과 비명도 오래, 쓰러져 있는 소녀의 흐트러진 매무새와 머리카락도 사실적으로 오래 보여주었다. 소년의 울부짖는 ‘사랑’은 다음날 인터넷 연예란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소녀를 두고 혼자 도망간 소년의 비겁함은 30년 전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낯설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녀 아역에게 이런 연기를 시키다니. 배우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청소년 연예인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관행이 드러났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청자 수준을 30년 전으로 함부로 돌려놓다니! 왜 하필 지금 이런 무리수를 두는가?

지상파에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런 장면을 보게 된 시청자들은 불쾌하다 못해 잠을 설쳤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제작진의 만행은 덮일 수 없다. 30년 전이라면 ‘줄거리 상 필수적 장면’이라는 제작진의 폭력의 합리화가 통했겠지만, 지금은 2012년이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30여 년 전의 <수사반장>만 떠올랐다. 아마도 주인공 소년의 가능한 미래 중 하나는 살인자가 된 대학생의 고통과 ‘보복’을 따라가는 게 되지 않을까.

MBC에 묻고 싶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지도자가 돼서, 날로 순위가 떨어지고 있는 여성격차지수 108위 국가의 비참한 현실을 한 방에 바꾸라는 말인가? (허나 그분은 이미 여당대표라는 최고위 지도자를 지냈다. 지난 5년간 지수는 매년 더 낮아졌다.) 남은 줄거리와 갈등 양상, 피해자들의 비통한 사연들이 ‘안 봐도 비디오’로 연상된다. 어떤 대사들이 오갈지도 대충 짐작된다. 왜냐하면 30년 전부터 많이 봐온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서 TV드라마에서 점점 사라지게 했던 악습이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뭐 얼마나 거창한 ‘사회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관심 없다. 이제와 대단한 정의감과 아동성폭력에 대한 의식을 피력해봐야 듣고 싶지 않다. ‘불편한 진실’을 보라는 그런 명분은 (지금은 표류중인)<PD수첩> 같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에나 어울린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은 다만 폭력일 뿐이다. 시청자에게는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절연(絶緣)도 방법이다. 보고 싶지 않다.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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