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투더더덩 투덩 투더더덩덩’ 휴일인데 창문에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새벽 5시15분.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불현듯 이틀 전 병원 옥상의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모종이 생각났다. 수확을 미룬 고구마도 걱정이다. 지난해 여름 상추 모종을 장맛비에 내놨다가 몽땅 망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심은 배추모종이 늦은 빗줄기에 무사할까….

 ⓒ 한상봉 기자

눈곱도 떼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실은 텃밭 때문이 아니다. 할아버지 때문이다. 6층 병동으로 급히 올라가니 내 추측이 맞았다. “고구마 다 썩어!” 이른 새벽에 빗소리를 들은 할아버지, 고구마를 캐러 옥상에 간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간호사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있다.

607호 병실의 김춘식 어르신은 내게 특별한 환자다. 어린 시절에 외갓집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이웃집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했다. 어둠을 뚫는 새벽의 별빛처럼 할아버지는 바지런한 시골의 아침을 깨웠다. 담장너머 돼지들의 웅성거림, 닭들의 홰치는 소리, 일찍부터 불을 밝힌 할머니의 부엌소리를 듣고 나는 눈을 떴다.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처럼 소를 몰고 들로 나가는 할아버지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루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노을을 그리면 “똘똘아!” 대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할아버지의 음성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방금 딴 머리통만한 호박, 반질반질 윤이 나는 보라색의 가지, 약이 바짝 오른 풋고추, 특별히 내 간식을 위한 옥수수, 이 푸짐한 수확물을 외갓집 툇마루에 쏟아놓고는 진한 흙냄새를 남기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1년 전 할아버지의 큰 따님으로부터 우연히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시골집에 혼자 남은 할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치매 증상이었다. 결국 1년 전에 할아버지는 고향집을 정리하고 이 병원에 입원했다.

할아버지는 병원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나 집에 데려다줘” 나만 보면 떼를 썼다. 침대위에 멍하니 앉아 허공을 맴도는 할아버지의 눈이 애처로웠다. 밥 한 숟가락도 채 먹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저러다 돌아가시면 어쩌지?’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러지 않아도 노인 병동에서는 질병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투신자살까지 하는 노인들이 있던 터였다. 평생을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논과 밭에서 흙의 기운을 먹고 산 할아버지에게는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병동이 감옥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할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평생 농사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린 인생의 결과가 이렇게 죽음만 기다리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살아야하나? 살리자고 입원시켰는데 치매증상은 악화되고 점점 멍청해지는 모습이 산 자의 것이 아니다.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먼저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할아버지 소원이 뭐에요?” “농사꾼이 땅을 갈아야지….” ‘맞아, 바로 그거다!’ 텃밭이었다.

병원 한가운데에 웬 텃밭? 직원들은 처음에는 마뜩찮게 여겼지만 돕겠다고 나섰다. 먼저 병원 옥상 위 열다섯 평의 시멘트바닥에 흙과 퇴비를 깔았다. 그럴듯했다. 물론 이 텃밭의 주인은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땅이니 뭐든 심으세요.” 텃밭 앞에서 할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철없이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이렇게까지 좋아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욕심쟁이 농사꾼은 심을 건 다 심었다. 상추, 가지, 대파, 고추, 호박, 오이, 감자, 토마토, 고구마….

작년 여름 104년만의 가뭄에 텃밭이 타 들어가고 말라죽는 작물이 속출했다. 이 부지런한 농부는 아침저녁으로 수분크림과 미스트로 피부를 보호하듯이 수도꼭지의 샤워기로 작물관리에 나서더니 매일 땡볕을 마다않고 땀을 흘리며 풀을 뽑았다. 저러다 병이라도 얻으면 어쩌지 모두 걱정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기른 모든 작물에 검은색 펜으로 ‘김춘식’이라고 꼼꼼하게 적었다. 이른바 원산지표시다. 덕분에 올 여름에는 김춘식표 가지와 호박, 토마토, 오이를 병원 식구들은 맛있게 먹고 나눠가졌다.

사람들은 방 안에서 화초를 재배하고 물고기를 기른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화분속의 식물과 어항속의 물고기는 과연 행복할까? 실험에 의하면 감정이 없는 식물도 화분 속에서는 갑갑해서 광합성과 성장속도가 뚝 떨어진다고 한다. 뿌리의 4분의3은 화분의 바깥쪽 절반 공간에 있어 틈만 있으면 화분 바깥쪽으로 도망치려는 행태를 보인다고 한다. 수조 속에서도 관상어도 마찬가지다. 비좁은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쉽게 병에 걸리고 공격적이 되어 서로 물어뜯어 상처를 입힌다고 한다.

화초와 물고기에게 화분과 어항이 아무리 넓다해도 들과 바다를 대신할 수 없듯이 할아버지에게도 이 텃밭이 할아버지의 고향을 대신할 수 없겠지만 남은 생애동안 지난날의 익숙했던 일상의 보람을 맛 볼 수 있는 작은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

“내년 봄엔 씨감자, 4월엔 상추 쑥갓 대파, 5월은 토마토, 가지, 오이, 고구마, 8월에는….” 607호 김춘식 어른신은 벌써 내년 농사를 그린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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