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환경운동가이자 싱어송라이터 가수인 일본의 오자와 켄지가 지은 <기업적인 사회, 테라피적인 사회(서현사, 2012)> 라는 책 제목에서 ‘사회’를 ‘교회’로 바꿔 붙여 본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업화’, ‘상품화’되는 사회에 대한 대항마로 ‘테라피적인 사회’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기업화된 사회에서 ‘기업’과 ‘테라피’ 양자는 짝을 이루어 기업적인 사회를 지탱해주는 버팀목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이 잣대로 교회를 들여다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팍팍해져만 가는 세상,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GDP(국내총생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생산 활동의 모든 것을 합계한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바로 이 생산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의 자리를 돈(자본)이 꿰차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으로 생산 활동에 포함되지 않던 것들도 생산 활동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가족의 식사를 만들거나, 본당에서 봉사 활동하는 것은 GDP계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돈 주고 고용한 요리사가 식사를 만들거나 사회복지사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것은 GDP로 계산됩니다. 이 GDP가 성장하는 것이 그 나라의 경제성장이라고 불립니다. 가정 살림하듯 요리는 요리사, 청소는 가정부, 아기는 베이비시터, 고민 상담은 카운슬러에게 맡겨 따로따로 해체되어 진행되면 그 나라는 경제가 성장한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게 됐습니다.

또한 자동차 공장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는 GDP에서 성장으로 계산되지만 생산 과정에서 나온 화학물질이 물을 오염시키는 것은 GDP에서 마이너스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과 공기를 오염시켜도 뭔가를 만들어 내면 그건 ‘성장’이라는 것이지요. 용산 철거민의 죽음,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 강행, 쌍용차 해고 문제,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 등은 모두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한 것, 외면해 온 것에 대한 우리 삶의 성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란이 되는 용어 중에 ‘민영화(privatization)’라는 말도 있습니다. ‘민(民)’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민주주의의 ‘민’이 연상되기 때문에 좋은 뜻 같지만 실상 이 용어는 민중과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제대로 쓰려면 ‘사기업화’, ‘사유화’라고 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게 되므로 민중들을 속이기 위한 방편임이 분명합니다. 이 민영화의 핵심은 국민을 손님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국민을 손님으로 대해주세요’, ‘무엇이든지 사고파는 것으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정부와 관공서, 학교와 보건소와 도서관 등 국민을 위한 시설은 기업처럼 운영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손님으로 대한다’라고 말하면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손님이라는 입장은 그리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의 손님은 돈을 낼 때에는 손님으로 대접받지만 돈을 지불하지 못하면 쫓겨나는 입장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국민을 손님으로 대하는 것의 의미는 국민을 약하게 하고 권리를 줄인다는 의미입니다. 본당에서, 교회기관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손님으로 대접받는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교회의 ‘사기업화’, ‘사유화’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셔야하지 않을까합니다.

성장지상주의가 삶을 지배하고,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조차 사기업화해 공공의 영역이 훼손된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생산 활동 참가자들, 평신도들의 삶은 휴식과 치유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성장지상주의와 사기업화로 대표되는 사회체제는 이 치유의 영역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오자와 켄지는 현대사회를 “불평등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패턴, 기계를 멈추지 않고 기계가 만드는 아픔만을 완화시키는 테크닉, 그 테크닉에 근거한 테라피적인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테라피적인 사회의 맥락에서 교회를 본다면 교회의 자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요?

최근 몇 년 사이에 확산된 순례, 피정 열풍에 대해 교회, 수도 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이상을 따르기 보다는 영성마저 상품화한 신자유주의식 ‘영성 쇼핑’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순례객, 피정객은 늘어도 예수의 삶을 따라 삶이 변하는 신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판단의 원인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현상을 ‘영성 쇼핑’으로 치부하는 것과 달리 근본적인 변화로 보기도 하는데 어떻게 판단을 하건 순례나 피정을 통한 영적 충만과 거룩함이 일상과 무관할 때 그 믿음은 소비된 믿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영성 쇼핑’ 현상은 결국 ‘테라피적인 사회’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일상에서 벗어난 순례나 피정이 일상을 다시 견디게 해주는 해독제, 피로 회복제로만 기능하는 한 현 체제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의 전제, 건강한 평신도들의 양성

얼마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50주년을 기념하는 토론회에 ‘평신도 양성’을 주제로 토론해달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토론회에는 ‘사제 양성’을 담당하는 분, ‘수도자 양성’에 오랜 경험을 가진 분들도 토론자로 초대 받았는데 사제, 수도자 양성에 비해 평신도 양성에 대해 무얼 말할 수 있을지 난감했습니다. 평신도들이 중심을 이루는 연구소의 특성 탓에 이런 저런 기회에 평신도를 주제로 여러 번 글을 썼는데 15년 전, 10년 전, 5년 전에 비해 지금의 상황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평신도성 규명’, ‘교회 쇄신’, ‘사회 복음화’라는 주제어들은 우리신학연구소의 핵심 연구 의제들입니다. 동전의 양면인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라는 과제는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건강한 평신도의 양성 없이는 요원한 일이기에 이 의제들은 서로 깊게 관련된 주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연구소의 한 선배 평신도 신학자에게 연구소는 평신도가 중심이 돼서 만든 곳이니 앞으로 평신도 문제를 가장 중요한 연구주제로 삼아야 하지 않겠냐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평신도가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의 걸림돌 아니냐며 사제들과 적극 협력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힘 빼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방식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주교회의 차원에서 사회교리주간이 제정되고, 교구마다 정평위 활동이 부활하고 교회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진 상황은 확실히 성직자들의 노력과 깊은 연관이 있으니 이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제안으로 이해했습니다.

평신도가 오히려 교회쇄신의 걸림돌이 아니냐는 지적은 평신도의 계층구성이 갈수록 중상층화 하면서 신앙 활동이 일종의 치유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지적과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선한 동기로 묵묵히 봉사하는 많은 평신도들이 좀 더 주도성을 갖고 본당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요?

‘테라피적인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에서는 대안적인 공동체 운동들이(마을만들기, 대안학교, 협동조합 등) 활발한데 이 운동들의 처음 시작은 거창한 계획이나 예산으로 시작한 일들이 아닙니다. 모범 사례로 소개되는 공동체 마을들을 잘 들여다보면 이런 식입니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의 부모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동육아가 생겨나고,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대안초중고들이 생겨나고, 마을에 살다보니 대안적 방식의 마을 만들기 운동도 생겨나고 협동조합도 만들고 하게 된 것입니다. 서로의 삶이 공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위고하, 상하 구분 없이 자유롭게 말하고 의기투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소공동체운동 20년이 지나도록 의미 있는 대안공동체 사례가 나오지 않고, 평신도 양성이 말잔치에 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밖의 사례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절실한 요즘입니다. 사람들이 시장만능주의, 세속주의로 인해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탓할게 아니라, 신앙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팍팍해진 평신도들의 삶에 교회는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건강한 평신도의 양성은 프로그램이나 콘텐츠의 문제가 아니라 평신도를 대하는 마음 자세, 태도, 언어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신앙의 해’를 지내는 교회 공동체의 화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글은 지난 11월 3일 서강대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50주년기념 심포지움에서 ‘평신도 양성과 영성’을 주제로 한 토론문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장,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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