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세상에 기죽지 말자"

▲ 9월 26일 홍대 앞 클럽 제스에서 열린 '금지곡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류금신 씨 ⓒ강한 기자

2000년대 초에 대학에 들어간 내가 학생회 행사에서 배우고 부르기 시작한 노래로 <희망의 노래>가 있다. “너의 빈 잔에 술을 따라라 / 너의 마음에 문을 열어라 / 피맺힌 노동에 / 무너진 가슴에 / 우리 희망의 꿈을 따라라”로 시작하며, 주로 ‘권주가’(술 마시기를 권하는 노래)로 많이 불렸던 이 노래가 류금신 씨의 노래였음을 인터뷰를 준비하면서야 알게 됐다. 1992년 7월 4일자 <한겨레> 인터뷰에 이 곡이 “최근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소개돼 있으니, <희망의 노래>는 적어도 10년 이상 대학가에서 애창되어 온 셈이다.

민중가수 류금신 씨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결성돼 노동가요를 태동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노동자노래단’ 출신이다. 당시 류 씨는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1991년에는 솔로 가수로 독립했고 1995년 <시 죽이기> 등 열 곡이 수록된 첫 앨범 <희망>을 발표했다.

작곡가 김호철 · 윤민석 씨와 함께 준비한 2집 음반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마무리 단계에서 무산됐다. 이때 녹음했던 노래 중 일부가 1996~97년 총파업 때 나온 ‘민주노총 후원 싱글 음반’에 실렸다. 1999년에는 <기도>를 비롯해 네 곡이 실린 싱글 앨범 ‘Life’가 나왔다.

내가 류금신 씨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에 ‘운동권’, ‘노동계’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였다. 근래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행사나 유신 40주년을 맞아 여러 차례 열린 ‘금지곡 콘서트’에서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등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마주치게 됐다.

‘이용석 열사’의 아픈 기억 아로새겨진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
“살자고 노래한 것이었는데…”

10월 27일 오후 서울에서 만난 류금신 씨는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중요한 일정이 두 건이나 있는 날이다. ‘유신 잔재 청산’을 주제로 홍대 앞 창무포스트극장에서 열리는 공연 ‘잔재너머 희망 페스티벌’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었고, 오후 5시 서울역 앞에서 열리는 ‘비정규직 철폐 10만 촛불행진’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동료 민중가수 박준, 지민주 씨와 함께 서울역 앞 단상에 오른 류금신 씨는 힘차게 주먹을 들어 올리며 집회를 시작하는 노래를 부른 뒤, 다시 홍대 앞 극장으로 달려갔다.

▲ 10월 27일 서울역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철폐 10만 촛불행진'에서 단상에 올라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부르는 류금신 씨(오른쪽 끝) ⓒ강한 기자

인터뷰 자리에서 류금신 씨는 서울역 앞에서 불렀던 노래가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라고 알려줬다. 이 곡에는 2003년 10월 26일 종묘공원에서 열린 ‘비정규직 차별철폐, 정규직화 · 권리보장 전국 비정규 노동자 대회’ 중 분신(焚身)해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난 ‘이용석 열사’에 대한 기억이 아로새겨졌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 광주본부장이었던 이용석 씨는 당시 서른두 살이었다.

9년 전 그날을 회상하며 류금신 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닦았다. 류 씨는 그때가 “마음의 상처가 바닥까지 내려가는 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3년 당시 비정규직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가수들이 모여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어 드리고자 음반을 제작했습니다. 10월 26일은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대회를 연 날이었지요. 11월 노동자대회가 얼마 안 남았기에 동지들에게 노래들을 선보이고자 준비하고 있던 터였고, 저는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가르쳐 드리고 내려와 뒤쪽에 가 있었는데, 비명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불에 타는 게 보였어요.”

그날 이후 류금신 씨는 자신의 노래와 활동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됐다. ‘살자고 노래한 것이었는데, 내가 너무 겁 없이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음반 제작을 마무리하는 한 달 동안 류 씨는 매번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부를 때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다고 한다.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부를 때면 2003년 당시의 상황이 가슴 속에 떠오릅니다. 이용석 열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내가 대신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후 류금신 씨는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꾸 눈물을 흘리고 울게 됐다. 점점 노래를 부르는 일도 어렵게 느껴졌다. 류 씨는 자신에게 심각한 위기가 왔다고 인정하고, 그때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

학점은행제를 통해 3년째 심리학 공부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을 돌아보는 일의 하나다. 류금신 씨는 “누구나 40대가 되면 자신을 돌아보는 때가 온다고 하는데 나도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학기에 많게는 세 과목, 적게는 두 과목을 수강하고, 공연 요청을 받아 노래를 부르고, 고등학생인 아들과 집안일을 돌보다 보면 여전히 일상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래도 틈틈이 명상을 했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위로도 받으며 여유를 얻었다.

올해 와서야 처음 열게 된 소박한 개인 콘서트
처음으로 ‘노래하는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껴

류금신 씨는 수없이 많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지난 6월 24일에야 첫 개인 콘서트를 열게 됐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한 거리 음악회였다. 류 씨는 이때 처음으로 ‘노래하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클래식기타와 신시사이저만을 곁들인 조용한 음악회였어요. 일요일 저녁이니만큼 조용하게 일주일을 정리하고, 안정을 취하면서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는 느낌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차분하고 위안이 되는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반주자들도 만났고요.

관객이 별로 없는 자리였습니다. 대한문 앞에서 농성 중인 몇 명, 친구들과 선배 몇 사람이 모여서 20~30명 앉아계셨어요. 그런데 그 음악회가 참 행복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정말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때 힌트를 얻은 것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노래를 했지만, 예전에 없었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차이가 무엇일까?”

류금신 씨는 “예전에는 내가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힘을 줘야 한다는 욕구가 있었다면, 그날은 그런 목적 없이, 물 흐르듯이 흘러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일까?” 하고 스스로 물었다.

ⓒ강한 기자

그가 요즘 푹 빠져 있다는 노래 <소풍날>과 <환하게>는 이날 대한문 앞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곡들이다. <소풍날>의 노랫말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에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선생님 말씀만 듣고 텅 빈 운동장에 홀로 남게 된 이야기다. 노랫말의 주인공은 자신을 업은 어머니 등에 피멍이 들도록 때리고 발버둥을 치다가 “백 원짜리 노을 빵” 하나를 받아들고 눈물을 훔치며 집에 돌아온다.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학교 소풍에서도 소외됐던 장애인의 가슴 아픈 기억이 담긴 노랫말이다.


▲ 6월 24일 대한문 앞 거리 음악회에서 류금신 씨가 부른 <소풍날>. ‘재생’ 버튼을 클릭하세요.
(음원 제공 / 양창권 @arco_kwon)

류금신 씨는 <소풍날>의 노랫말이 된 시를 어느 겨울 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장애인들의 시 낭송회에서 알게 됐고, 이 시를 받아 노래로 부르게 됐다. 최근 공연에서 <소풍날>을 부르면 보사노바 풍의 노래를 들으며 박수를 치던 사람들이 점차 박수를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환하게>는 노동자 시인 조성웅 씨가 2004년 울산 플랜트 노조 출범식을 보며 지은 시에 노래를 붙인 것이다. 류금신 씨는 플랜트 노조에는 중장년 건설노동자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장년층의 노동자들, 그리고 최근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즐겁게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류 씨는 특히 몇몇 대학에서 그 실태가 알려진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에 대해 알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성이 모여 있다는 대학교에서조차 50~60대 청소노동자들이 쉴 공간도 갖지 못한 채 ‘유령’처럼 지내다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세상을 향해 자기 권리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류금신 씨에게 <환하게>는 세대와 영역의 구분 없이 모든 노동자는 함께 가야 한다는 희망으로 부르는 노래다.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영성음악회’ 열고 싶다
내년 발표 목표로 새 앨범도 준비 중

<환하게>를 작곡한 우창수 씨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민중가수로, 류 씨의 후배다. 류금신 씨가 홍대와 서울역을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내던 10월 27일에 우창수 씨는 부산에서 ‘영성음악회’를 열었다고 한다. 류 씨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새로운 시도다.

그는 공연을 마친 우창수 씨에게서 “행복했습니다” 하는 감상을 전해 듣고서 또다시 힌트를 얻은 느낌이었다. 대한문 앞 소박한 개인 콘서트에서 느꼈던 자신의 행복감이 연상되며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류금신 씨는 머지않아 ‘우리 식’대로 하는 영성음악회를 열어 볼 마음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도 공연장이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또한 류 씨는 내년 발표를 목표로 새 앨범도 준비하고 있다. 그에게는 2013년이 재미있고, 무언가 ‘저지르는’ 해가 될 것 같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세상에 기죽지 말자
앞으로도 따뜻한 위로의 노래 부를 것

류금신 씨는 그가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노동자노래단이 결성됐던 1980년대 중반을 회고하며 “그때는 노동자들에게 쌓였던 것이 나오는 상황이라 노래도 세야 했고, 목소리도 커야 했다”고 말했다.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좇아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냉혹한 세상이기에, 앞으로도 ‘현장’은 그에게 강렬한 투쟁곡을 불러달라고 청할 것이다.

그럼에도 류금신 씨는 따뜻한 노래, 서정적인 노래를 많이 부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는 “노동자라고 어떻게 매일 싸우기만 하겠는가” 물으며, 노동자들의 분노 밑바닥에는 슬픔과 서정이 깔려 있다고 전했다.

“주변을 보면 참 상처가 많고 살기 힘든 것 같아요. 세상이 인간을 너무 불쌍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마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태어났을 텐데, 지금은 인간을 너무나 비참하게 하고 위축되게 하는 사회에요. 이런 세상에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따뜻한 노래, 함께 위로하고 힘을 내자고 말하는 노래를 많이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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