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 들른 오래 사귄 친구 같은 수도원

2010년 9월 24일, 내 인생에 다시 해보기 쉽지 않을 모험을 감행했다. 프랑스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도착한 다음, 한 달 동안 800 킬로미터를 걸어 스페인 북서쪽 끝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지까지 도보 순례를 하는 일정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순례지로 불리는 곳이고, 천년이 넘게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매년 유럽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 오랜 시간 걸어서 이곳을 순례한다.

▲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 ⓒ박현동

산티아고 순례길에 들른 수도원

이름난 순례지를 걷는 것이니까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도 사제가 부족하여 동네마다 아름다운 성당은 있지만, 성당문은 잠겨 있고 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날이 있곤 했다. 특히 시골 산길을 걸을 때 주말과 겹치면 혹시 주일 미사를 드리지 못할까 싶어서 토요일 특전 미사를 하고 걷기도 했기 때문에, 주일을 어디서 지낼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주일을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바로 내가 지나가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있었다.

무작정 그곳 아빠스께 방문해도 되는지 메일을 보냈다. 한나절도 안 되어 손님담당 수사로부터 허락의 메일이 도착했고, 그 메일에는 수도원으로 오는 대중교통도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주말에 맞춰 수도원에 도착하려면 하루에 40킬로미터 넘게 무리해서 걸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발에 물집은 커져갔고, 길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빨리 헤어져야 했다. 때론 오후 늦게까지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들판 길을 혼자서 걷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수고들은 실로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말끔히 사라지고, 오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확 밀려왔다.

뜻밖의 만남

꽤 큰 도시인 부르고스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하루 한두 차례 있는 버스가 주말에는 운행하지 않는다는 여행안내소(!)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어떻게든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서 그 다음에 다시 다른 방안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차편이 영 걱정되었는지 손님담당 수사가 다시 메일을 보내왔다. 오후에 실로스로 오는 버스가 터미널에서 한번 있으니, 그 차를 절대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여행안내소보다 그 수사의 말을 믿고 버스터미널에 가니 정말 버스가 있었다. 60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이 동네 저 동네 다 서다보니 시간은 꽤 많이 걸린 것 같다. 길옆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때론 철 지난 해바라기 밭을 지나가기도 했다. 나지막한 구름도 정말 멋있었다.

▲ 실로스로 가는 길에 마주친 철지난 해바라기 밭 ⓒ박현동

손님담당 수사가 안내해 준 방에 짐을 풀자마자, 나를 제일 먼저 환영해 준 사람은 나와 함께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서 살고 있던, 현 로마 안셀모 대학의 학장인 후앙 하비에르 플로레스 신부였다.‘아니! 플로레스 신부의 수도원이 여기였어!’마침 방학이라 자신의 수도원에 와 있었다. 평소에 같이 살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도 못했고, 다소 무뚝뚝하게 보이는 분이었기에 복도에서 마주쳐도 가벼운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사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수도원에 손님으로 온 로마의 동거인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며 환대를 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양 친구가 스페인의 주보성인인 야고보 사도의 무덤까지 걸어서 순례를 하고 있다고 하니…. 만나자마자 내 이름을 스페인식의 애칭“블라씽!”으로 부르며 친근감을 드러내더니, 그날 오후에, 일 년에 한번 있는 도미니코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마을을 도는 행렬과 9월의 토요일 저녁에만 열리는 연례 수도원 음악회에도 함께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그리고 수도원 곳곳을 직접 설명해 주고, 끝기도 후에는 성당 밖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미로와 같은 수도원 건물 안에서 내 방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도착하자마자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 거주하는 모든 스페인 신부들에게 메일로 블라시오가 산티아고 순례하는 도중에 자신의 수도원에 들렀다고 긴급 메일(!)을 보낸 모양이었다.

▲ 행렬 후 도미니코 성인 유해에 친구하는 예식 ⓒ박현동

유구한 역사와 풍성한 문화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은 그 역사로 따지면 천년이 훨씬 넘은 수도원이다. 우리에게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1990년대 중반에 이례적으로 그레고리오 성가 앨범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앨범이 3백만 장 넘게 팔린 적이 있었다. 세계적인 대히트였다. 바로 그 수도원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솔렘수도원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하지만 이 수도원 역시 베네딕도회 중 하나인 솔렘 연합회에 속한 곳이니 그 음악적 디엔에이(DNA)를 숨기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수도자들도 연세 드신 분이 많고, 예전과 같은 소리가 나진 않지만 성당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를 때면 솔렘 수도원과는 또 다른 소리로 기도를 하신다.

이런 음악적 전통이 있어서인지 9월 한 달 동안 토요일 저녁이면 1년 동안 준비한 음악회가 열린다. 참가자들은 아주 쟁쟁한 연주자들이고, 이 음악회를 위해 수도자들과 지역 사회가 함께 위원회를 구성하여 준비한다. 2주 후 토요일 밤에는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클래식 기타 연주자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보지 못해 아쉬웠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음악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본래 그 장소는 수도원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자리였다. 하지만 몇 백 년 동안 폐허로 버려져 있던 수도원을 실로스 수도원이 매입한 후, 인근 도시의 대학교 건축학과와 장기계약을 맺고, 수도원 리모델링에 소요되는 자재비용은 수도원에서 부담하고, 복원과 설계, 시공 등의 일은 건축학과 학생들이 직접하며 하나의 실습장이 되게 했다고 한다. 정확히 몇 해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2,30년의 시간이 걸려 2009년 11월에 축복식을 했다고 한다. 완공 후엔 개인 피정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대강당에서는 강연회나 음악회를 연다고 했다. 역시 역사 있는 수도원의 결정이구나 싶었다.

수도원이 오래되다 보니 도서관 또한 귀중한 필사본이 많다고 한다. 어떤 필사본들은 규모가 큰 도서관에 팔리기도 했지만, 스페인의 고유한 전례인 모자라빅 전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수도원이 가장 중심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된 도서관은 오래된 수도원 건물들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고 있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성당과 수도자들 숙소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시로 미로들을 통하여 수도자들이 들락거리고, 자료를 검색하곤 했다.

▲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 내에 있는 도서관 ⓒ박현동

오래 사귄 친구 같은 수도원

공동체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많았지만, 젊은 형제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주일 저녁에는 밖에서 저녁식사를 한다고 했다. 플로레스 학장 신부를 따라 정원으로 나가니,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마치 터널처럼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중간에 의자와 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조금 있으니 전기 자동차로 빵과 음료수, 포도주 같은 것들을 주방에서 싣고 왔다. 아마 여름철 주일 저녁에 이렇게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날이 밝을 때 시작한 저녁 식사는 주위가 한참 어두워지도록 계속되었다. 로마에서 공부한 형제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쉽게 물어볼 수 있었다. 이곳에 단지 이틀 머물렀을 뿐인데, 아주 친근한 느낌이 드는 수도원이었다.

주일 오후에 수도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보았다. 큰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수도원은 오래된 냄새가 많이 났다. 주위에 큰 건물들은 별로 없었다. 가까이에는 나무가 많지 않은 산들이 있고, 주민들도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이 작은 마을의 시골 수도원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할 작품이 나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다.

다시 순례길로

월요일 아침, 수도원 문간에서 기다리다 “블라씽! 순례 잘 하고, 10월에 로마에서 다시 보자”며 진한 작별의 포옹을 하는 플로레스 신부를 뒤로 하고, 다시 순례를 시작할 부르고스행 버스에 올랐다. 월요일이라 그 유명한 부르고스 대성당의 문이 잠겨 있으면, 그곳 수위를 찾아 자신의 이름을 대면 문을 열어 줄 거라고 귀띔까지 해 준다. 순례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면 “플로레스 신부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마치 친한 친구 사이처럼,“후앙 하비에르! 그때 고마웠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내가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에서 받은 인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 ⓒ박현동

▲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 전경 ⓒ박현동

▲ 실로스의 산토 도밍고 수도원으로 가는 길 ⓒ박현동

참고할 누리집
http://www.abadiadesilos.es

박현동 신부(성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행하는 <분도>지 2012년 가을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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