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서른 안팎 무렵, 20여 년 전 김해자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저 반지하방에 살던 A급 미싱사 한 살 터울 누님이었다. 어려워도 구김살 없던 그 시절처럼 오늘도 그녀는 함박웃음 지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 한상봉 기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김해자, 인연)

이십년지기던가, 김해자 시인. 그저 한 살 터울 밖에 안 되지만, 늘 해자 ‘누나’라고 불렀는데, 눈꼬리가 쳐져서 순한 눈매의, 시린 세월을 보낸 탓인지 ‘관대한’ 마음이 된 시인이 ‘해탈’까지 하려나 보다. “화염 속에 어느덧 화엄에 들어/쓰다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는 평생 누군가의 몸을 뽀송뽀송 닦아주고, 얼룩진 세상을 훔치며 거덜난 육신이다. 그래서 영혼은 더욱 맑아진다. 갑자기 “죽으면 썩을 몸”이라며 몸 부릴 줄 알았던 엄마의 한 마디가 가슴에 아려온다.

전쟁 같은 하루 또 하루다. 지난 수년 동안 언론을 시작하면서 ‘휴가’란 안중에 없었다. 쉬고 싶어도 몸은 바스라지지 않았고, 그런대로 견뎌주는 바람에 ‘자발성 없는’ 나는 휴식을 알지 못한다. ‘일 중독’이라 스스로 병명을 붙었는데,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남 탓을 할 게 없다. 그래도 최근 몇 달 동안은 ‘슬럼프’였다. 일을 계속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 시간만 붙잡고 있을 뿐 제대로 해낸 일이 별로 없다. 다행히 기민한 기자들 덕분에 그나마 큰 사고 없이 언론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 들어 기운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 아마 가을 탓일 것이다.

화염같은 세상을 화엄으로 갈아엎자고 하는 언론이다. 가을이 깊어가면 내가 아니어도 거리에 즐비한 낙엽 단풍이 거리를 화엄장식하는 듯 해서 다행이다. 그만큼 나도 그참에 나도 덩달아 일하고 싶다. 날씨가 추워지면 여름내 지겨웠던 육신이 사랑스러워진다. 내 몸의 온기를 내가 느낄 수 있어서 가을은 나를 내가 존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고마운 계절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젖었다 마르는 수건처럼, 마르면 더 뽀송뽀송해지는 수건처럼 고난을 통해 성숙해 가는 법이다. 슬럼프를 겪어야 지친 어깨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 궂은 날 괘념치 말고 맑은 날 생각하며 걷기로 다짐해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에머슨이 전한 말을 떠올린다.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보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서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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