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 기자

초등학교 동창생 두 사람을 만났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생활도 함께 했으므로 수년 만에 만났지만 친근감이 느껴졌다. 대화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신앙생활 하려면 너무 깊이 알려고 캐묻고 따지면 안 되나봐. 예를 들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야기, 동정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성서 이야기도 그렇고...”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손자 이야기를 했다. “ 손자 놈이 전에는 미사 때 복사도 하고 열심히 성당에 나왔는데 중학교에 다니면서 냉담을 해요. 내가 성당에 가자고 하면 ‘할머니! 이제는 교회에 못 가겠어요. 비이성적인 게 많고... 그래서 의심은 많아지고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 어려워 질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그 아이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몸에 배었고 신앙생활에 적용된다. 과학에는 실험하고 증명하고 확인이 되므로 의심도 없다. ‘2+2=4’ 처럼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만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믿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어떻게 보면 믿고 안 믿고 할 자유도 없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주관적이다. 신앙생활에서는 늘 의심이 따르기 마련이고 확인할 방법도 별로 없다. 믿고 안 믿고는 그 사람의 자유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신앙이 굳어지지 않고 그 사람의 체험을 통해 신앙이 깊어진다.

아오스딩 성인은 곡식이 익어가는 누런 들판을 보면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다는 기적 이야기가 떠오른다고 하였다. 지금도 누런 곡식이 드넓은 들판에서 익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배를 채우게 하는 것도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이라고 아오스딩 성인은 생각했다. 이렇게 성서의 기적만 보고 현재의 삶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 즉 기적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는 의심이 많아 질 것이다.

‘성모님이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낳았다’는 성서 이야기를 화란 교리서에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자녀를 낳는다는 자체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결혼을 통해서 자녀를 낳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 동정녀를 통해서도 할 수 있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신비롭고 놀라운 우주의 창조물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 뒤에 있는 분을 보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과학시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가르치는 방법에서도 이성적인 면에 치중한다. 서양의 저명한 신학자는 교리를 가르칠 때 깨달음을 얻게 하기보다는 암기시키는데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교리를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하는 경우도 많은데, 단점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시험 때문에 머리에 기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좋은 말씀을 외워서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비자들에게 이론적으로 신앙을 설명하며 가르치기 보다는 신앙체험을 들려주고 체험을 나누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사실 신앙은 들음으로 신앙의 싹이 트이지만 신앙이 견고해지는 것은 체험과 증거를 통해서라고 한다.

우리가 사람과 깊이 만나고 사귈 때 논리나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고 사람이나 인격적인 자세가 중요하듯 성서도 그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 같은 사람이 하느님을 본다’는 영성적인 말이 있다.
성서에서도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겠고, 그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겠다고 말씀하셨다.(요한 14.21)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황상근 신부
(인천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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