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 박홍기

한가위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가위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으로 송이버섯이 꼽혔다고 한다. 송이버섯 하면 잊혀지지 않는 분이 있다. 신입약사 시절 내게 송이버섯을 남겨 주시고 세상을 떠난 환자이다.

병동에서 연락이 왔다. 조제한 약에서 정체 모를 이물질이 섞여 있으니 확인해 달라고 한다. 산재병동에 입원한 진폐증 환자들은 워낙 예민하고 까다로워 직접 확인을 해야 한다. 진폐증 환자의 경우 호흡곤란이 갑자기 오면 졸지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다반사다. 아침까지 옆 침대에서 농담을 주고받던 환자가 불과 몇 시간 후에 침대를 비우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이 병동에서는 일상의 풍경이다. 그래서 환자들은 하루하루를 외줄타기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산다. 그러니 직원들의 작은 실수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305호실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인자한 눈에 미소를 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미안합니다. 제가 부주의 했어요.” 사과가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이다. “약사 처자,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자그마한 몸집에 창백한 얼굴, 깊게 패인 주름의 배덕순 할아버지는 진폐증 환자다. 하도 오래 입원해서 병실은 할아버지의 안방이고 침대 주위에는 할아버지의 일상용품들이 빼곡하다. 할아버지는 열일곱 살에 문경탄광에서 막장일을 시작했다. 33년 동안 석탄가루를 마신 셈이다. 그래도 폐 안에 석탄가루가 쌓이는 것도 몰랐다. 어느 날 숨쉬기가 힘들어지더니 기침만 하면 가래에서 핏덩어리가 섞여 나왔다. 검사를 해보니 오른쪽 폐는 이미 결핵균이 다 갉아먹었다. 한 쪽 폐를 잘라낸 후, 진폐 1급 판정을 받고 산재병원에 입원한 것이 20년 전이다. 이후로 전국의 산재병원을 전전하다가 이 병원에 온지 3년이다. 이물질 사건 이후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할아버지는 귤이나 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건네신다. 말동무를 만들고 싶으신 게다.

할아버지는 막장인생이 못 배운 탓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발자국조차 떼기 어려운 호흡곤란으로 헉헉거리지만 목숨에 집착하는 이유는 매월 받는 산재연금 때문이다. 이 연금으로 다섯 자녀를 키웠다. 고향인 봉화 산골에 남아서 밭농사를 짓는 아내를 돕는 길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는데다 감기까지 겹치면 숨 한번 내쉬고 들이마시는 일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산소 호흡기를 빌리지 않고는 호흡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렇게 목숨을 부지해야 연금을 탈 수 있으니 대부분의 환자들이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계를 꾸린다고 할 수 있다.

“약사 처자, 내 좀 잠깐 보이소.” 걷기조차 힘든 할아버지가 약제실 창구에서 나를 부른다. 할아버지와 얼굴을 익힌 후로 오늘은 약제실 창구까지 진출하셨다. 특별히 할아버지가 아끼는 자양강장제 ‘박카스’도 한 병 챙겨 오셨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나오라고 하신다. 병원 뜰의 의자로 데리고 가시더니 박카스 뚜껑까지 따서 권한다.


“약사처자는 시집 안 가능가?”
“애인은 있능가?:
“나이는?”
일종의 신상 털기가 시작되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속내를 보이신다.
“내 막내 아들이 있는데...”

진폐는 회복이 안 되는 병이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시한부 목숨이라고 할까. 죽는 날이 곧 퇴원날이다. 합병증이 심해 항상 죽음의 경계에 산다.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가족을 위해서다. 숨이라도 붙어 있어야 매달 받는 연금으로 가족들에게 가장의 미안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기약없는 입원생활에서 유일한 낙은 1년에 한 번 추석에만 허용되는 고향으로의 임시 외출이다. 10년, 20년, 30년 동안 계속된 병원생활에서 고향땅을 밟는 이 날마저도 없다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선 인간으로서 결코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런 탓에 진폐 병동은 추석만 다가오면 설레임과 활기로 분주해진다.

올 추석에는 할아버지가 결심을 굳게 다졌다. 막내아들 때문이다. 항상 불안했다. 막내가 장가 가는 걸 못 보고 죽나 걱정이 되어서다. 그러던 터에 할아버지의 레이더망에 내가 걸려 들었다. 서울에서 외환은행 다닌다는 막내아들과 궁합도 딱 맞다고 할아버지는 신이 났다. 아무리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다. 천생연분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면 아들녀석의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끌고 와서 꼭 약사 처자와 맞선을 보게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할아버지에게 심상찮은 낌새가 나타났다. 천식이 악화되면서 호흡곤란에다 폐에 심한 출혈이 왔다. 강심제, 항생제, 호흡촉진제를 쏟아 부었지만 소용이 없다. 산소호흡기로 가느다란 숨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모두 휴가를 떠난 텅 빈 병실에서 할아버지가 삶과 죽음의 사투를 벌인다. 일흔살이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한다.

연락을 받고 가족 중에서 할머니가 부랴부랴 봉화에서 올라오셨다. 할아버지의 작은 몸이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느라 요동친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 숨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마지막 숨을 떠나보내기가 이리도 힘든가. 할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뱉아냈다. 순식간이었다. 까만 하늘에 두둥실 한가위 보름달이 할아버지를 배웅하고 있었다.

“약사 처자!”
며칠후 약제실로 할머니가 오셨다. 일부러 봉화에서 오셨다고 한다. 분홍색 보자기에 싼 큼직한 보퉁이를 쑥 내미신다. 송이버섯이다.

추석이 다가오자 할아버지는 아내에게 미리 전화를 했다. 점 찍어둔 막내 며느리감이 있으니 송이 좋은 놈으로 골라서 듬뿍 싸놓으라고. 그 부탁이 유언처럼 남아 할머니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할아버지가 주신 송이버섯은 ‘진폐증’이란 그냥 ‘폐에 석탄가루가 쌓이는 병’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분의 긴 투병은 가족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무력함과 미안함이 용해된 삶의 용광로였다. 잡것들을 녹이는 뜨거운 희생을 통해 마침내 정련된 순수한 철을 생산하는 제련공처럼 송이버섯은 막내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담금질한 최고의 뇌물(?)이었다.

외환은행을 들릴 때마다 깍듯이 인사하는 친절한 직원이 있다. 말씨와 억양이 할아버지와 비슷하다. “혹시 배덕순 씨를 아시나요?” 세월을 잠깐 잊고 묻고 싶어진다. 할아버지의 송이버섯에 진 빚 때문일까?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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