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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보소서, 가련한 우리[김원의 리얼몽상]

   
 
둘 다 웃을 순 없다고 한다. 한 쪽의 행복은 다른 한 쪽의 불행을 밟고 온다고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빚을 준 자와 빚을 진 자, 둘 중 하나가 웃으려면 다른 한 쪽은 울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된다는 논리, 귀에 못이 박이게 듣지 않았는가?

그래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잔인한 ‘구조조정’과 ‘추심’을 용인한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침묵하는 동안 척척 진행된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라 한다. 누군가의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도, 그러다 목숨까지 날아가도, 누군가는 돈을 벌게 되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는 이득’이라는 명분이다. 그런데 만일, 그 신체를 절단 당하는 이가 내 가족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바로 몸이 굳고 살이 떨린다. 지옥이다. 그 절단의 순간 이후로, 생은 연명조차 여의치 않은 악몽이다. 한 번 바닥으로 떨어지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 패자부활전 없는 세상에서 더 내려갈 지옥은 없다. 적어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에서는 그렇다. 물론 여기서의 신체장애는 일종의 상징이고 메타포다. 실제 장애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어떤 다른 가능성도 봉쇄한 채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극중 ‘엄마’의 대사처럼 묻고 싶다. 왜 그렇게까지 잔인해야 했을까.

보라, 이 세상을

보고 나면 미칠 것 같다. 그냥 감독을 ‘미친 놈’이라고 (예전처럼)욕해 주면 딱 좋겠는데, 이건 뭐 개봉과 동시에 세계 최고 권위의 베니스영화제 작품상 그것도 국내 초유의 수상작이 돼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이 작품을 욕하려면 전 세계 영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도전을 각오해야 한다. 영화 역사의 권위를 뒤집어야 한다. <피에타> 때문에 이제 관객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딱 걸렸다.

게다가 이 영화에 가상의 것은 없다. 모두 현실에 있는 것들이다. 조합만 약간 극단적으로 얽어놓았을 뿐, 세상에 없는 것을 지어낸 게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열여덟 편이나 되는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김기덕의 작품 세계를 불편해하는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

그간 김기덕의 작품들이 어떠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순 제작비 1억5천만원으로 신속하게 찍은 영화의 저 리얼하다 못해 현실의 것을 잠시 빌려 담아냈을 영상들은 날것의 현실이다. 관계도 캐릭터도 상황도 모두 따로 떼어놓고 보면 다 익숙한 것들이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써먹는 소재들이다. 일말의 틈새도 없이 비극적으로 몰아갔을 뿐, 이 금융자본이 주인인 살풍경한 세상의 날줄과 씨줄은 모두 현실이다. 제한시간 내에 집약적으로 떠냈을 뿐 가공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우리가 아직 사람이라면

사람은 누군가의 온기 옆에서만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그 따뜻한 체온의 상징이 곧 ‘어머니’일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온기라고는 못 받고 살아온 이강도(이정진 분)의 삶이 그리 삭막하게 됐을 것이다. 아무것도 못 느끼고 무감각하게 살아야 밥벌이가 되는 그에게 유일한 힘은 분노를 되씹는 데서 온다.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정하게 살지언정 자기를 버린 생모처럼 무책임하지는 않았다는 게 그나마 강도의 떳떳함일까. 그 뼈에 사무쳤던 원한은 또 다른 원한과 복수심을 연쇄적으로 낳는다. 그가 엄마(조민수 분)라는 낯선 여자를 그토록 못 미더워하면서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은 너무나 지독한 슬픔이다.

본디 사람은 남의 피를 짜먹고 웃으며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양심이다. 그래서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은, 그 해치는 과정을 타인에게 ‘하청’ 준다. 외부 ‘용역’이니 ‘고용유연화’니 하는 신조어도 쓴다. 푼돈을 벌려고 “인간 백정”이길 마다않는 그 보잘 것없는 ‘개인’에게 책임을 한정짓고자 한다. 사무실에 앉아 ‘서류’만 만진 자신은 이 살육의 돈놀이와 무관하다고 끝까지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이강도를 고용한 사채업자가 강도를 모욕하고 발로 차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 손에 직접 피는 묻히기 싫고 피 묻은 놈과도 멀리 하고 싶은 그 본심 말이다. 업주가 사진을 보낸 이에게서 돈을 받아오지 못하면 ‘일용할 양식’이 생기지 않는 채권추심원 강도에게, “언제 병신 만들랬어? 돈 받아오랬지!”라는 선긋기의 질책이야말로 화려한 수사(修辭)요 결백을 가장한 손 씻기다. 그러고서 피 묻힌 놈을 잘라버리고 “너 대신 일 잘하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그만이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모실 사람이 없다.” “여기서 50년을 버텼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빚 밖에는.” “나 병신 돼도 좋아,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런 모든 사연을 마주앉아 들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받아와야 하는 건 어차피 밑바닥 인생인 강도의 몫일 뿐이다.

가족을 이루는 건 이제 사치인가?

이 금융지옥에서도 어떻게든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붙들려는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관객의 심장을 후벼 판다. 보는 동안은 물론 보고 난 이후에도 잔상이 남는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지키고자 하는 다른 존재가 있다. 대개는 가족일 것이다. 우리가 끝내 믿어야 하는 건 다른 존재를 위해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착한 본성이다.

가족만이, 결국은 유일한 구원의 통로인 것인가.
피붙이가 되는 일도 어쩌면 공들임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고 처음부터 ‘엄마’로 정해진 게 아니었다. 아들은 점차 아들이 되어갔고, 엄마는 점차 엄마로 변모해갔다.

그런데 이제 가족을 만들려면 목숨을 저잣거리에 내놓아야 할 것 같다. 영화 <피에타> 속의 사람들은 그런 곳에 산다. 기름밥 먹어가며 열심히 일한 선반공들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가족을 위해 끝없이 제 몸을 희생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다. 아니 실은 풀칠조차 제대로 못한다. 몸을 바친 대가는 너무도 보잘 것 없다. 그런 불쌍한 세계를 냉소하면서 고기를 뜯으며 무감각하게 수행하던 밥벌이조차, ‘엄마’라는 신원미상의 사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지속 불가능해진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종교 없이 신앙 없이 마주보는 현실은 비참함 그 자체다.

   
 

회심(回心)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그럼에도 영화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마지막을 보여주면서 대속(代贖)의 숭고미를 구현한다. 회심(回心)이 어려운 이유는, 다시는 이전처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쳐먹은 순간 모든 삶의 방향이 바뀐다. 다시는 이전 방식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운명을 걸어야 한다.

인간의 회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품에 안을 수 있고 안길 수 있는 살과 피를 가진 존재뿐이다. <피에타>는 칼 끝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 심장같은 사람을 가졌느냐고, 만일 없다면 계속 그런 사람 없이도 살아 갈 수 있겠느냐고.

영화 <피에타>는 우리에게 위안일까 독배일까. 어느덧 동서양의 모든 상징체계를 다 편하게 영상언어로 그려낼 줄 알게 된 김기덕의 내공은, 이 가련한 우리의 모습을 아무것으로도 가릴 수 없게 했다. ‘피에타’의 비탄의 모자상(母子象)은 현재형이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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