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순교자성월, 특히 오늘과 같은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면 200여 년 전 한국 천주교회를 싹 틔운 여러 신앙인의 삶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순교’라는 그 무거운 말에 짓눌려서인지, 그 당시 선조들이 체험하고 고백한 신앙의 의미보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따라하지도 못할 비범한 성인들의 특별한 사건으로만 여겨져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103위 순교성인 각각이 보여준 영웅적 일화는 마치 소설 속 이야기나 전설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200여 년 전 구체적 역사로 존재했던 사실인데도 말이다.

성인전을 읽으며 소설처럼 느껴지던 것과 달리, 1년 전에 나온 <흑산>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생생한 우리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김훈이라는 뛰어난 소설가의 구성 능력과 문체의 유려함이 그 생동감을 더 살렸겠지만, 나는 순교성인전에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로 대다수 평범한 신앙인들의 삶을 짐작케 하는 소설 속 허구의 등장인물들에게 눈길이 끌렸다.

<흑산>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정약전은 한국 천주교회를 싹트게 한 천진암 강학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이 학식 높은 유학자는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배교로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여생을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로 보낸다. 살아남은 그에게 천주교 신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작가는 직접 말하지 않지만,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의 삶과 신앙을 통해 그 당시 신앙인들의 깊은 신심을 드러낸다.

이 책에는 정약전과 황사영 외에도 다른 양반 지식인,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여러 계층의 신자들이 등장한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안의 귀한 존재라는 혁명적 가르침 때문에 양반 지식인들은 참된 진리로 느끼고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런 가르침의 직접적 대상이 된 가난한 이들은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체험 속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단지 머릿속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달라졌다.

유교 중심의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만난 여인, 마부, 노비 등 하층민 사람들은, 천주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도 자신들을 따스하게 대해 주는 사람을 따라 자연스레 신앙인이 된다. 이들 가난한 이들은 체포되었을 때 배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차피 잔혹한 매질 속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평민과 천민들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순교자가 된다. 한국 천주교회 박해 시기 100년 동안 목숨을 잃은 이들이 1만 명 정도라 한다. 이미 시성된 한국의 103위 성인은 그 이름과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성인품에 오른 극히 소수의 이들이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그렇게 역사 속에서 잠들어 있는 셈이다. 이름을 남길 수 없었던 이들, 그들은 아마 대부분 여성과 천민들이었을 것이다.

또, 신앙 때문에 형벌을 받고 때론 목숨을 잃었지만, 도중에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잊혀진 이들도 있다. 잡히면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가난한 신자들과 달리, 당시 지배계층이던 양반 신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유학자 양반 신자들은 배교를 하고 목숨을 보전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정약전의 동생이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약용 역시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배교하고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가 정말로 배교를 했는지 아니면 표면상으로는 배교였어도 실제로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는지는 지금까지도 여러 논란이 있다.

정약용처럼 유학자 양반 신자들은 상당수가 배교하거나 배교와 복교를 반복하기도 했다. 오늘의 눈으로야 이들의 신앙심은 목숨을 내던져 신앙을 고백한 순교성인들의 신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정말로 그들의 신앙이 어떠하였는지 감히 예단하기 어렵다. 양반 유학자들의 순교와 배교 길을 가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교황청의 조상제사 금지 결정이 컸다. 지금은 아름다운 토착화의 사례로 여겨지는 조상제사가 당시에는 우상숭배로 해석되어 신자들의 목숨과 신앙을 좌지우지했다. 충과 효가 몸 깊이 배어 있던 유학자들이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조상제사를 거부하지 못한 것을 과연 진정한 배교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물론 진심으로 배교하고 신앙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을 테지만, 배교라 말하고도 실제로는 신앙의 삶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일례로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한번 내뱉은 배교의 말 때문에 같은 날 참수 당한 다른 순교자들이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될 때 제외되었는데, 그녀가 배교의 말을 내뱉은 것은 감옥에 갇혀 젖먹이 아들이 굶어 죽는 걸 본 순간이었다고 한다. 남편도 참수 당하고 맏아들은 천주교 사제가 되겠다고 멀리 떠나 있는 상황에서, 이성례는 천주를 부인하고 풀려나 남은 어린 네 자식에게 맏형이 돌아올 때까지 잘 견디라 당부하고 다시 제 발로 감옥으로 돌아가 순교한다. 그런 그녀가 내뱉은 배교의 말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녀처럼 자식을 돌봐야 한다는 모성애 때문에 배교할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 신자들은 정말 평생 배교자로 살았을까?

최근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 때 제외된 한국 순교자 124위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 등 125명의 시복시성청원을 추진하고 있다. 머지않아 200여 명의 순교성인을 기억하며 기도할 날이 올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일이나 매년 순교자성월과 대축일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훌륭했던 선조의 삶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삶을 오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하다면 죽음과 형벌의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 성조의 삶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동료 신자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살아남아 신앙을 증거하고자 했던 선조의 삶도 소중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 같다. 그들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무겁게 지고 그 시대를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복음을 나누었던 선조의 삶,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던 선조의 신앙을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리라.

이미영 (발비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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