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 앤 송 + 사람-4= 봄눈별]

"가난한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시절에는 모든 것에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다. 무엇인가 못마땅한 나머지, 화를 자주 냈다. 불행했다. 온 가족이 그렇게 화를 냈고, 깊은 밤이 오면 깊이 잠들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서로에게 주며 격렬하게 싸우곤 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나는 울었다.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었다." (봄눈별의 글)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굳게 믿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자랐고, 지금 그는 행복하기 위해 가난해지려고 애쓴다. 더 나누고 더 가난해지려는 사람, 그의 이름은 '봄눈별'이다.

봄눈별 ©정현진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두물머리였다. 인디언 피리를 나직하게 불고 있었다. 그가 부는 피리 소리는 바람 같기도 하고, 엄마 품속 같기도 하고, 따뜻한 햇살 같기도 했다. 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 피리를 불면, 그 피리 소리는 사람들이 그 순간 가장 그리워하는 그 무엇이 됐다.

그는 이끌리는 것에 무섭게 빠져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서른을 갓 넘긴 무렵부터 3~4년 동안은 3천여 편의 글을 썼다.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글로 풀었고, 그것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어느 순간 글이 너무 고독했고, 다른 돌파구를 찾게 됐다. 고독을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간절해졌다. 어느날 손에 잡힌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통해 인디언들의 삶에 꽂혔고, 인디언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발길 닿는 곳 어디서나 피리를 불었다. 그렇게 5개월쯤 지났을 때, 광화문에서 연주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온 '록빠' 친구가 함께 활동하기를 권했다. 록빠는 티벳 난민의 자립을 지원하는 시민단체로, 그때부터 두리반, 기륭전자 노동자, 두물머리 등을 함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은 두물머리는 쓸쓸하고 황량했다고 말한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찾아오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꼬박 2년간 이어졌고 그는 두물머리에 둥지를 틀었다.

▲ 두물머리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봄눈별(왼쪽) ©팔당공동대책위원회

인디언 피리, 자연과 함께 숨쉬는 소리의 마력
연주자와 듣는 이들의 마음, 공간을 잇는 숨

"북미 인디언들에게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악보도 없어요. 인디언들의 삶은 자신들의 존재가 자연과 하나로 연결됐다고 믿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피리도 자연과의 대화 수단이죠. 녹음된 음원을 들어 보면, 피리 음은 3초, 자연의 소리 10초, 또 5초간의 피리 그리고 자연음……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론이나 공식이 불편하다는 봄눈별에게 인디언 피리는 맞춤과도 같다. 악보도, 정해진 계획도 없이 피리를 잡은 당시의 감정을 호흡의 세기, 여백, 숨의 길이로 표현한다. 현재 가장 예쁘게 낼 수 있는 음은 9개 정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연주 실력은 늘었지만, 조금씩 실력을 쌓는 것에 마음이 쓰이다 보니, 처음 피리를 시작하며 자신과 듣는 이에게 치유와 쉼을 주려던 마음이 줄어들었다며 아쉬워한다. 

봄눈별은 "인디언 피리는 내면을 바라보게 해 주는 악기고, 자신의 숨, 마음과 가장 닮은 소리를 낸다"면서, "기교와 기술이 없었지만 내 마음을 더 많이 어루만져줬던 처음 그때가 그립다"고 말했다.

봄눈별은 최근 3개월간 약 40회의 공연을 열었다. 강행군이었다. 두물머리를 비롯해 힘든 이들이 있는 현장을 자유로이 찾던 봄눈별이 공연을 시작한 계기는 바로 '강정마을'이었다.

구럼비 바위 첫 폭파가 강행된 지난 3월초, 강정마을을 찾은 그에게 '치유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연주 자리가 주어졌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엄마의 품을 떠올리며 들어 달라"는 주문을 하고 피리를 불었다.

▲ 봄눈별이 강정마을에서 쓴 '일강정 좋구나' 가사 ©팔당공동대책위원회

서울로 돌아와서 강정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치유 음악회'를 열어 강정 후원금을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시간짜리 이야기와 연주, 10여 분의 명상으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이 공연에는 지난 시간의 마음 공부가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명상을 통해 화해, 용서, 사과, 고백을 이끌고 스스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쓴다.

되도록 많은 것을 나누고 싶지만 가진 것이 마음과 인디언 피리 뿐이라, 자연스럽게 재능기부를 선택하게 됐다는 봄눈별은 당분간 '치유'를 주제로 공연을 계속하면서, 재능기부가 필요한 곳에는 언제든 달려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피리 소리에 울고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더 큰 동력이 됐다.

행복하기 위해 가난해지려는 사람.. 봄밤의 눈을 지켜보는 별처럼

가난 때문에 불행했다던 그는 지금 오히려 더 가난해지는 길을 찾고 있다. 컴퓨터 엔지니어였고 웹진을 만들고 피자 배달을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날 반백수의 삶을 선택하고 1년이 지나 더 가난해지기로 했다. 그 시절을 그는 "나는 내가 몹시 가난한 나머지 돌았다고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완전히 '백수'가 되면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채식과 한달 5만 원의 유기농 꾸러미를 선택하고 아프면 안되므로 담배를 끊고, 미용실 가는 돈을 아끼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물로만 몸을 씻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고 싶었던 여행과 봉사활동을 가기로 했고, 어려운 이들을 더 많이 찾아다녔다. 누군가는 "가난뱅이 주제에 돈 안 되는 일만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는 "가난해서 행복하다"고 굳게 믿게 됐다.

▲ 봄눈별과 록빠 친구 솔밧. 솔밧은 봄눈별의 공연을 돕는 매니저이기도 하다. ©정현진 기자

먼 길을 돌아 세상과 다르게 살고 있는 지금, 제 자리를 찾은 것 같냐고 물었다.

"원래 가졌던 감수성과 예술적인 끼를 어떻게 표현하고 살아야 할지 알게 됐죠. 그런 부분에서는 내 삶의 방식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삶의 태도 측면에서는 오히려 나다운 것을 버렸죠. 어디를 가든 내가 머물러 있는 공간과 시간,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지내요. 그러자면 나다운 것을 어느 정도 버려야 하죠. 저는 만만한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예수라고 불리면서 마음을 다해 모든 이를 예수로 대접한, 따뜻했던 그 사람처럼…….

봄.눈.별.

별이(別異)라는 원래 별칭에 어느날 들은 <봄눈>이라는 노래 제목을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봄눈이 흩날리는 밤에 홀로 빛나는 별. "흔치 않은 봄밤의 눈처럼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해 준다.  

봄눈별은 그런 이름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 지난 3월 20일, 강정평화음악회에서 인디언 피리를 연주하는 봄눈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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