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에 한 푼이 있다.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라. 그 과정은 너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많으리라.” (마하트마 간디)

현장 취재를 다니면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것은 그간의 내 삶이 누구에게 어떻게 빚지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농민들이 어떻게 땅을 지키며 내게 밥을 먹이는지, 전기가 어떻게 내 책상 위의 컴퓨터를 돌리는지, 나의 안전을 위한 사업에 누군가가 어떻게 삶에서 내몰리는지……. 어쭙잖게 ‘소외 당하고 가난한 이들’이라 뭉뚱그려 부르던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작년 11월 처음으로 밀양을 찾았다. 송전탑을 세우겠다고 벌목을 진행하는 현장 산길을 오르면서,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 하나만으로도 송전탑을 결사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흔, 여든이 되도록 평생을 살아 온 마을, 고향, 삶의 터전. 재산이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것보다 더 분한 것은, 허락도 없이 삶을 망가뜨린 그들의 오만함이었다.

▲ 송전탑 건설 공사를 막기 위해 산에 오른 주민들 (사진 출처 / '765kv송전탑 건설, 이대로는 안된다' 네이버 카페)

국책사업이라는 말 앞에 100여 명의 촌부들은 우습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무시 당하던 이들이 해를 넘겨 공사를 막아 내고 있다. 유서를 품고, 휘발유를 지고, 죽기 전에는 물러나지 못하겠다면서 바득바득 산을 기어오른다. 병원으로 실려갔다가도 돌아오고, 일을 하다가도 전기톱 소리라도 날라치면 순식간에 모여든다. 한국전력공사(한전)은 별것 아니었던 이들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콧등을 물려도 아주 제대로 물렸다. <식스 센스> 뺨치는 반전 드라마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한전은 기껏 10억짜리 손배소로 위협한다. 목숨을 건 사람들에게 10억 손배소란 한순간 코웃음 거리다. 지난 1월 이웃의 죽음을 목격했고, 유서를 품고 다니는 이들에게 손배소라니……. 어르신들은 한술 더 떠 “내 재산 다 가져가라”고 응수한다.

우리 때문에 희생하고, 싸우는 사람들..

밀양을 지나는 69기의 초고압 송전탑은 밀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송전탑이 들어서는 한 현장 근처에는 공교롭게도 “전기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의 공동체가 있다. 경남 북부지역 대도시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이 송전탑은 울산 울주군부터 창녕군까지 이어진다. 한전은 ‘경제성과 비용절감’을 이유로 마을이 없는 지역을 돌아가는 대신, 밀양을 관통하기로 했고, 총 162기의 송전탑 중 69기를 밀양 땅에 촘촘히 짓겠다는 결정을 했다. 물론 이 송전탑 뒤에는 5천 2백억 원짜리 신고리 핵발전소 5 · 6호기가 있다.

처음에 밀양 주민들은 불의하고 부당하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에 분노했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점점 국가폭력의 문제, 핵발전의 문제 등을 드러냈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전기 소비를 비롯한 방만한 삶의 현주소를 짚어 냈다. 형태와 내용은 다르지만,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공권력의 횡포, 국책사업과 경제성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어떤 이들이 짓밟혀도 된다는 ‘사회적 학살’을 증거한다.

▲ 거대한 초고압 송전탑. 1기를 세우는 데 약 200평의 땅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 / '765kv송전탑 건설, 이대로는 안된다' 네이버 카페)

지난 1월 분신으로 사망한 고(故) 이치우 열사의 동생 이상우 씨는 형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시에 가서 보면, 밤에도 불빛이 꽃 같습디다. 그렇게 전기를 돌리면서, 부족하다고 발전소 짓고, 송전탑 세우고…….”

전력 자립도 2.45%의 서울, 밤을 꽃처럼 밝히는 도시들..
우리 삶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2001년 정부가 세운 전력수급기본계획으로 한전이 전국에서 추진 중인 송전선로 사업은 총 41개로 전국에 세운 송전탑 개수 1600여 개. 서울의 전력자립도 2.45%.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의 38% 수도권으로 송전.

서울과 수도권에서 온 밤을 전기꽃으로 수놓는 동안 송전탑 건설로 파괴된 지역이 최소 41개라는 말이다. 현재 정관, 청도, 창녕에서도 송전탑 건설로 인한 싸움이 진행 중이다.

사진 출처 / 블로거 가넷

이쯤 되면 “송전탑 서울에 세우라”는 밀양 주민들의 외침을 지역 이기주의 따위로 몰아붙일 수 없다. 또 대안에너지 정책이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서울에서 쓰는 전기를 서울에서 생산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다.

최소한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껏 너무 큰 빚을 졌던 셈이다. 한쪽에서는 억울하게 삶을 강탈 당하고 “살던 대로 살게 해 달라”며 목숨을 걸고 있는데, 지금껏 그런 이들을 밟고 살아 왔던 도시민들이 “살던 대로 편하게 살겠다”며 모른 척 한다면 그것은 빚을 넘어 죄악이다.

밀양 송전탑 싸움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지 모른다. 속죄의 길,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로 우리 역시 당할지 모르는, 아니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국가 공권력의 횡포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로 때우기에는 그들의 희생이 너무나 무겁지 않은가.

“지금 쓰고 있는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생각해 보라. 그 과정은 당신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많을 것이다.”

덧붙여 지난 밀양 취재에서 들은 불행 중 유쾌한 이야기 하나. 밀양 주민들은 현재 올해 안에 송전탑 1기도 세우지 못하게 한다는 목표를 두고 싸우고 있다. 그 이후로도 싸움은 지속되겠지만, 송전탑 건설이 백지화되면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 어느 섬을 통째로 빌려서 그동안 고생한 사람들 모두 무료로 놀게 해 주실 예정이란다. 그리고 놀러 다녀와서는 송전탑이나 핵발전소 때문에 싸우고 있는 다른 지역에 도와주러 갈 조 편성까지 해 두셨단다. 어르신들이 너무 귀여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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