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임의진
나 야훼께 피신하거늘
너희 어찌 나더러 이런 소리 하느냐?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라.
보라, 악인들이 활을 당겨
시위에 살을 먹여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 하지 않느냐?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
그러나 야훼께서는 당신 성전에서
하늘 높이 옥좌에 앉으시어
세상을 두루 살피시고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계신다.
죄 있는 사람,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내시며
폭력 쓰는 자를 몹시 미워하신다.
숯불과 유황을 악인 위에 쏟으시며
불바람을 그들 몫으로 안겨주신다.
야훼, 공정하시어 옳은 일 좋아하시니,
올바른 자 그 얼굴 뵙게 되리라.

(시편 11장)

북미 인디언들은 스웨트 롯지(Sweat Lodge)를 마을 복판에 한 칸씩 지었다. 그들은 이걸 '엄마 자궁'이라 설명했다. 고갯마루에 가장 오래 묵은 할아버지 돌을 주워다가 모닥불에 달구었다. 버들가지를 찢어 얼기설기 틀을 짜고, 들소 가죽으로 덮은 반구형 롯지(오두막집)에 이 달아오른 할아버지 돌을 모셔왔다. 그리고 깨끗한 물을 받아 이 할아버지 돌에 붓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롯지 가득 증기가 차서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동네 모든 주민들이 이 롯지에 들어가 증기를 쐰다. 증기를 쐬고 밖으로 하나둘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다시 태어남이라 불렀다. 스웨트 롯지에 몸을 피신하면 보호 받는 것만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은총을 입는다고 그들은 믿었다.

주님의 품에 안긴 사람은 하늘의 보살핌 말고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경험을 갖기에 이른다. 펭귄이 날개를 포기하고 진화한 이유는 간단하다. 육지엔 먹을 게 없는 동토에서 물 속 깊이 잠수해 물고기를 많이 잡아먹기 위해서다. 주님의 사람들은 권력의 보호와 자본의 축적으로는 영적 배고픔에 죽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안팎으로 변화해야 한다. 치렁치렁한 성의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주목받는 '쇼'를 만끽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허망한 날개를 버리고 영적 세계에 깊이 잠수해야 살 길이 열린다. 주님의 물, 주님의 증기를 쐬며 주님과의 계약 안에서 철저해야 한다.

예수는 죄인들이란 물 속에 잠수했다. 그 안에서 잃은 양들을 찾으셨다. 올바른 자는 그 얼굴 뵙고, 성큼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마태 9,11)

깨어남의 빛(light of awareness)에 감싸인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안타까운(?)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깨어나지 못하면 자신의 어리석음, 자신의 무지를 알지 못하고 바깥에서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나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습관과 왜곡된 신념과 의지다.

하느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안전함에 깃들면 어떤 자리에 있어도, 어떤 사람들과 함께해도 평화를 누린다. 히브리어 동사 '바타흐'는 '안전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번역할 때는 '신뢰'라고 옮기고는 한다. 주님에게 안전과 생명을 맡긴 사람은 행복하다. 삐요삐요 경광등을 반짝이며 달려온 경호 시스템이 결코 지켜줄 수 없는 인생이란 게 있는 것이다.

"너무 추워서 장갑을 끼고 시를 쓴다. 하지만 그래야 시가 사랑스러웠다"고 말했던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를 기억한다. 매서운 바람이 창틀을 흔드는 추위 속에서 그녀는 절실했고 간절했다. 그런 시인의 집에 찾아가는 시는 어떤 시겠는가. 얼마나 뜨거운 사랑이었겠는가.

오! 여름이 가는 듯 싶었으나 입추가 지났어도 연일 폭우와 폭염이다. 지하 셋방은 물난리고, 전기가 끊긴 집엔 불어 터진 라면발이 썩어가고 있다. 기후 변화가 심상치 않다. 폭력을 쓰는 자들, 자연에 폭력을 행사한 자들 때문이리라. 하늘을 향해, 숲을 향해, 강물을 향해 총질하고 침을 뱉은 자들은 안전한 집과 에어컨 아래서 두 다리를 뻗고 곤히 단잠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듯 불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 가시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야,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결정은 다르다.

숯불과 유황과 불바람을 피할 인생이란 없다. 물론 종말은 모두에게 임한다. 모든 인생의 죽음은 종말이다. 그런데 죽음은 반드시 명쾌한 심판 앞에 놓이게 마련이다. 축복(베라카)은 모름지기 세상의 평화(샬롬)가 아니런가. 세상의 평화를 짓밟은 이들에게 축복이 절대 임할 수 없는 법이렷다. 악인의 죽음은 영멸을 의미하고, 그가 자랑하던 모든 명예, 모든 자산은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어 '엘레오스'는 자비라는 뜻이다. 라틴어로는 '미세리코르디아'(Misericordia)다. 자비는 한계가 없고, 드넓으며 영원한 품일 것이다. 하지만 자비를 보통 히브리어 '헤셋'을 번역할 때 쓰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이해다. 구약성서에 줄기차게 나오는 '헤셋'은 상호간의 계약에 의해서만 체결되는 '특수한 관계의 사랑'이다. 영원한 사랑, 한계가 없는 축복조차 주님과의 계약 안에서만 진행되는 사랑이다.

주님과 나, 주님과 우리는 정의 안에서, 올바른 삶 안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사랑의 윙크를 나누는 사이다. 축복과 신앙, 은혜와 신앙, 구원과 신앙……. 오로지 우리는 생명, 평화, 정의를 향한 신앙을 일구어 나갈 때만 주님과 한 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영원무궁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가 이 지구별에 임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동 여하, 약속 이행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주님께 피신한 우리가 방정맞게 주님이 필요 없다 말하고, 주님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투정이란 말인가. 주님과의 약속 따위 잊고, 초심을 버린 채 배은망덕하지 말 일이다. 축복과 은혜와 구원을 값없이 여기지 말기를. 항상 입에 달고 다닐 말인즉슨, "주님! 제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는 당신께 피신한 가여운 목숨입니다." "주님! 약속을 지키는 이 사랑, 변치 않게 하옵소서!"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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