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존 매든 감독

수식언이 많은 문장은 의심스럽다. 부사, 형용사가 빼곡한 표현은 어쩐지 양파를 닮았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다시 말해 수식 대상을 찾고 찾아봐도 껍질 이상의 어떤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피수식언은 대개 명사이다. 그래서 젊은 날의 서정주는 정지용 류의 명사형 시를 탈피하고 동사형의 시를 쓰겠노라고 말했다. ‘바다’나 ‘배’ 같은 단어를 중심으로 참신하고 아름다운 형용사를 나열하는 방식을 벗어나 ‘스며라, 배암’ 같은 시구가 보여 주는, 동사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시를 쓰고자 했던 것이다.

수식언이 많은 표현.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영화의 제목이 딱 그렇다. 베스트는 엑조틱을, 엑조틱은 메리골드를 수식한다. 메리골드는 고유명사로서 호텔과 한몸을 이룬다. 대체 메리골드(Marigold)가 뭐기에? 그것은 ‘홍황초’라 번역되는 한해살이 야생초다. 꽃말은 가엾은 애정, 이별의 슬픔. 여기에 ‘최고로 이국적인’이라는 수식언을 붙여 보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살포시 비치지 않는가.

영화는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이블린(주디 덴치 분)의 목소리로 서술된다. 남편이 죽은 후에야 집안의 재정 상태를 알게 된 이블린은 장례식과 빚잔치를 함께 치른 뒤 아들에게 얹혀살아야 할 처지이다. 한평생 의지했던 남편의 비밀에 내상을 입은 그녀로서는 남편도 아니면서 남편처럼 모든 것을 자기 식으로 결정하는 아들과 함께 살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바로 그 순간 인터넷으로 메리골드 호텔이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분의 황혼기를 대영제국의 향수가 담긴 인도 궁전에서 지내십시오”라고 속삭이니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서야 어디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이 인도행을 결심한 이유는 처지에 따라 다르지만 결정적인 것은 물가가 싸다는 점일 터다. 서사의 맺음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뮤리엘(매기 스미스 분)은 흑인 의사에게 진료 받기를 거부할 정도로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저렴하게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일곱 명의 노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다.

메리골드 호텔에는 아버지가 남긴 호텔을 성공적으로 경영해서 어머니의 인정을 받으려는 야심찬 인도 청년 소니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괜찮아지고, 현재가 그렇지 않다면 때가 안 된 것”이라고 말하는, 대책 없이 낙관적인 이 청년의 러브스토리는 호텔 경영의 성패와 엮어지면서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요란스런 이름만큼 의심스런 지점이 있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국의 몰락기에 태어나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 빈곤한 여생이 예상되는 영국의 노인들이다. 이들이 옛 식민지에 정착해 이국적인 감각을 즐기고, 인생에 서툰 인도인을 도우며 노년을 보낸다는 설정 자체가 식민주의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불편한 심기를 내려놓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초로(初老)인 여성 관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웃음소리 덕분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을 평일 오전 7~8시와 오후 1시에 상영한다. 상영 시간만 봐도 타깃이 된 관객층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이른 아침 식탁을 물리고 영화관에 가겠다고 핸드백을 챙기거나, 삼삼오오 짝지어 브런치를 먹고 극장에 간 후 수다를 떨 수 있는 영화가 주변에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외손주의 베이비시터 노릇을 하면서는 남편감을 만날 수 없다고 딸의 집을 박차고 나간 마지, 딸의 벤처 사업에 퇴직금 전액을 투자하고 실버타운을 찾다가 인도행을 결심한 부부 더글라스와 진. 그러고 보니 아들이 아니라 딸이 문제네. 알파 걸들의 유일한 백그라운드가 늙은 부모라는 말? 맞선 프로그램 조건으로 천연덕스럽게 20, 30대를 희망하고는 상대에게 40대라고 ‘구라를 치는’ 노먼. 상대 여성은 야무지게 “40년대 초에 태어나신 것 같은데요”라고 쏘아붙인다. 빙고!

이들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에 한국 드라마는 아직 완고한 측면이 많은 것이다. 막장 설정이 없는 드라마로 칭송을 받는 ‘넝쿨당’에서 윤여정의 외출은 얼마나 소심하게 이루어지던가.

이 영화에서 체크아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같은 영화와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차이다. 또한 2008년 <무한도전> 인도 특집이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릴케는 과일이 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내부에 죽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삶이 단순한 권리가 아닌 특권”인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 있는 죽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내용이다. 또한 줄리아 로버츠보다는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가 더 잘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7인의 모험가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할 때 메리골드 호텔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인물들은 자신들이 놓인 지점이 ‘베스트 엑조틱’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생은 파도다. 피하면 휩쓸리지만 뛰어들면 살아남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현재와 같은 미래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라” 같은 경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우리가 모르지 않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양파를 닮았다. 그럼에도 끝없는 모험과 도전에의 찬양, 그리고 7인의 우정과 사랑은 우리를 고양시킨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다가 엉뚱하게도 최근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온 <무한도전>을 떠올렸던가.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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