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너를 위해 산 것이 나를 위해 산 것

사제관은 비가 샌다. 오래된 성당은 낡아 빠지다 못해 삭는 중이다. 어느 날 우거진 풀숲에 완전히 파묻혀 숲의 일부가 된다 한들 하등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다. 우체부만 오가는 오솔길에는 인적도 드물다. 비오는 날이면 곳곳에 양동이를 받쳐 놓아야 하는 허름한 사제관에 야곱 신부가 산다. 눈도 안 보이는 노인이다. 그나마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초라함이 안 보이니 다행인 건가.

신자 하나 없을 것 같은 시골 성당은 텅 비어 있다. 언제 미사가 열렸을지 그 또한 아득해 보인다. 하지만 야곱 신부는 엄연한 현역 사제이고 성당과 사제관은 ‘알고 보면’ 붐빈다. 날마다 도착하는 편지들 덕택이다. 야곱 신부가 여기를 떠날 수 없는 이유도 편지 때문이다. 혹시 편지를 못 받게 될까봐 이사는 꿈도 꾸지 않는다.

<야곱 신부의 편지>는 핀란드 영화다. 핀란드라면 우리가 이 시끄러운 복지 논쟁 속에서 으뜸 모델로 꼽는 선망의 복지국가다. ‘핀란드처럼’을 내세우며 표심 잡기를 진행한지 꽤 됐다.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영상을 더 주의깊게 보았다. ‘복지국가’의 신부는 얼마나 번듯하며 성당은 얼마나 그럴듯할지 호기심도 갔다.

그런데 지켜볼수록 어이가 없었다. 뭐 이다지도 가난한가. 대체 비 오는 날 양동이를 받쳐야 하는 사제관이라니. 거기에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어쩌면 단 하나의 업무인) 답장 편지조차 쓸 수 없는 눈 먼 신부님이라니!

아마 영화 속의 가난과 장애 등등은 의미 전달을 위한 설정에 가까울 것이다. 퇴락해 가는 성당의 모습도 현대 교회가 처한 위기의 상징일 수 있다. 어쨌든 이 독특한 영화의 시나리오는 사회복지사가 썼다고 한다. 작가가 사회복지사가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삶의 체험에서 나온 상상력의 단단함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기도는 언제 하는가

야곱 신부는 어려서부터 앞을 못 봤다. 성서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읽어 달라고 조르는 게 일이었다. 몇 장 몇 절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자리에서 외워버렸다는 걸 보니 선천성 같다. 그 어린 날부터 지닌 성서를 신부는 평생 품고 다닌다. 어려서부터 타인의 도움 없이는 세상과, 심지어 하느님과의 소통도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야곱 신부는 그렇게 말씀인 하느님과, 하느님과의 다리가 돼 준 이웃들의 고마운 도움을 통해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몸은 불편해도 그가 여전히 사제일 수 있는 건 편지 쓰는 신부님이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신부님께 편지를 쓰고 답장을 구한다.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을 오직 야곱 신부에게만 털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신부는 배달된 편지들 앞에서 늘 숙연하게 기다린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풀 도구로 자신을 쓰심을 믿는 그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행복하고 설렌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그를 살게 한다.

“오늘은 또 어떤 마음의 짐들이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어느 날부터 편지가 뚝 끊어지게 된 후, 야곱 신부는 죽음보다 더한 어둠을 생애 처음으로 겪게 된다. 하느님의 손길조차 미치지 않는 듯한 절망 속을 헤매다 그는 마침내 엎드려 고백한다.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던 편지조차 내려놓는다.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제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는 편지조차 오지 않는데. 제가 사람들을 위로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편지로 인해 위로 받은 건 제 자신이었습니다.”

편지는 언제 쓰는가

레일라는 종신형을 살던 사형수였다. 사람을 죽였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토록 사랑하는 언니를 괴롭히는 몹쓸 형부였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은 어쩌면 레일라 자신의 영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산 사람 같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언니는 물론 누구의 면회나 편지도 거절하며 감방살이를 했다. 몸은 물론 정신도 완전히 수형 생활에 찌들었다.

원치도 않던 사면에 이어, 편지를 읽어 주고 대신 쓰는 일을 맡게 된 레일라는 짜증스럽다. 하느님도 야곱 신부도 다 못마땅하다. 편지,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보내는 사람도 답장 쓰는 사람도 다 한심해 보이고 귀찮을 뿐이다. 급기야 편지 뭉치의 절반 이상을 우물에 버리기 시작한다. 답장을 못 받게 되니 편지는 서서히 줄어든다. 마침내는 거짓말처럼 한 통도 오지 않게 된다.

야곱 신부는 생기를 잃고 점점 시들어간다. 실제로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다.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몸부림을 계속한다. 도움을 청하는 신부를 텅 빈 성당에 버려두고 가면서 레일라는 분노를 터뜨린다. 나를 위한 보살핌을 받아 보지 못한 자의 절규다.

“(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절 사면하셨잖아요!”

때마침 내린 빗방울 덕에 신부도 레일라도 기적적으로 죽음의 선을 넘게 된 그날 이후로도 편지는 오지 않는다. 이제 초조해진 건 레일라다. 야곱 신부는 자포자기한 채 무덤덤하게 지내는데, 레일라는 어떻게든 편지를 만들어 보려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한다. 그러다 할 수 없이 결국 자신이 발신인이 된 편지를 야곱 신부에게 띄운다.

편지는 격식이다. 야곱 신부에게 편지를 쓰려면, 그가 받은 대부분의 편지들이 유지하고 있는 격식에 따라야 한다. 순응이라고는 모르던 레일라로서는 처음으로 완전히 순종한 셈이다. 레일라의 육성 편지에는 깊은 진심의 고백이 담겨 있다. 야곱 신부가 어쩌면 평생을 기다려왔을 필생의 편지가 배달되는 순간이었다.

구원은 언제 오는가

그리고 레일라는 처음으로, 언니가 야곱 신부에게 보낸 편지 뭉치들을 보게 된다.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언니가 있었다. 동생의 사면을 위해 그 오랜 세월 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눈 먼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일뿐이었다. 언니는 편지 쓰기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동생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잠시나마 멎게 하기 위해.

“(레일라는) 저의 고통을 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 살아서는 나의 구원에 도달할 수 없었다. 내가 너의 일부이며 숨구멍이며 너의 뒷모습이었다. 나의 구원은 결국 타인들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 사람은 빈손을 상대에게 내보이게 된다.

나는 언제 내가 되는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 무수한 타인들의 손이 없었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맞잡아 줄 서로의 손 말고는 가진 게 없는 가난하고 따뜻한 빈손의 기적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 교회는 지금 빈손인가? 교회 안의 우리는 빈손인가? 야곱 신부님 같은 수신인조차 없는 이들은 아픈 마음의 짐을 어디로 부쳐야 하는가.

김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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