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지요하]

어렸을 적부터 '교우'(敎友)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사용하며 자랐다. 지금도 나는 ‘신자’라는 말보다는 ‘교우’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처음 대하는 신자와 인사를 나눌 때도 “천주교 신자시군요”한다거나 “성당 다니시는군요” 하지 않고, “우리 교우시군요”라고 한다. 천주교 신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내게는 다 ‘교우’다. 아니, 과거에는 그랬다.

‘교우’라는 호칭의 쇠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거나 일면식도 없는 이라도 천주교 신자라고 하면 '교우지정'(敎友之情)을 느끼곤 했다. 외교인인 친척들보다도 교우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분명했다. 대중 매체에서 어느 누군가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럭 반가움과 호감을 갖게 되는 것도 일종의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한다.

내 소년 시절의 아버지 모습을 환히 기억한다. 당시 우리 집은 <경향신문>을 구독했다. 아버지가 <경향신문>을 구독한 것은 당시 <경향신문>이 천주교 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장면 박사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박사를 축출한 박정희를 혐오했다.

물론 훗날의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가 장면 박사를 좋아하고 박정희를 혐오한 것은 어떤 정치 철학이나 역사의식의 소산이 아니었다. 단지 장면 박사가 천주교 신자, 즉 ‘교우’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신문을 통해 어느 누군가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게 되면 “어, 이분이 우리 교우시네”라며 되우 반가워했다. 아버지는 어느 누구라도 천주교 신자라면 무조건 ‘교우’였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영향 속에서 자랐다. ‘교우’라는 지칭으로 표현되는 교우지정은 내 부모만이 아니었다. 100명 남짓의 공소(公所) 신자들 모두가 교우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교우지정 속에서 살았다.

이 ‘교우’라는 호칭은 당시 수십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 교회 신자들 거의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신자 500만 명 시대인 지금은 이 호칭이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신자 간에 서로 인사를 나눌 때 “천주교 신자시군요”라고 하지, “우리 교우시군요”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어쩌다 ‘교우’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는 신자를 만나게 되면 더럭 반갑고 아련한 향수에 젖어들기도 한다.

어렸을 적부터 ‘교우’라는 호칭 속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교우지정의 작용 속에서 알게 모르게 ‘동질감’ 같은 것도 키워왔던 듯싶다. 교우라고 하면 모든 이가 다 똑같고, 나와 동질의 마음을 갖고 살 거라는 착각 속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 같다.

▲ 매일을 한결같이 봉헌되는 두물머리 생명평화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최근엔 두물머리에 대한 관심이 적어져 참석자들도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고동주 기자

반성과 참회는 신자의 기본

성인이 되고 세상 물정을 알아가면서 천주교 신자라고 다 똑같은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양심과 신심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은 얼마든지 ‘양심 따로, 신앙심 따로’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길에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뜨거운 신앙심으로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회 현실에는 아예 눈을 감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적이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따르지는 않는 현상,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오히려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얼마 전 한 사제가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신자입니까? 준자(遵者; 따르는 자)입니까?”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신자와 준자의 차이, 그것의 극명함이 얼마나 뼈아팠으면 사제가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준자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신자’의 기본인 ‘양심’만이라도 제대로 지니고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이들도 있다. 왜 천주교 신자가 됐는지,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궁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천주교 신자가 됨으로써 가치관이나 행동 양식이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됐는지, 예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는지,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닮으려는 노력은 하는지, 절로 궁금해지는 경우도 많다.

최근 천주교 신자인 한 여성 정치인의 행로를 보면서 예의 그 궁금증이 더욱 커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남의 노고를 도둑질했다. 그 도둑질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고 크게 유명해졌다. 그 덕에 국회의원도 되고 권력의 맛도 누리게 됐다.

도둑질 당한 사람의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졌다. 도둑질 당한 사람과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사람들을 오히려 도둑질한 사람이 고소를 했다. 적반하장의 극치였다. 재판은 7년을 끌었다. 도둑질한 사람의 능력, 권력의 작용으로 재판이 7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게 됐다.

그 7년 동안 그는 승승장구했다. 권력의 상층부에서 호사를 누렸다. 그러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 신자임을 세상에 드러냈다. 신자임을 내세우며 ‘월요 시국기도회―여의도 거리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에 대해 맹렬히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음에도 그는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지 않는다. 등경 밑에 감추었던 표절과 도작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그는 계속 표절과 도작이 아니라고 우긴다. 그에게는 반성도 참회도 없다. 천주교 신자에게는 반성과 참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성과 참회가 동전의 한 면이라면, 다른 한 면은 진실함과 정직함이다. 반성과 참회, 진실과 정직이 한 몸을 이룰 때 자신을 일러 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길을 부정하는 신자들

천주교 신자 500만 명 시대의 명암이 너무도 뚜렷하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결코 기쁜 일만은 아니다. 얼치기 신자, 사이비 신자들도 많다고 한다면 너무 독단적인 말일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회 현실에는 눈을 감고 사는 사람들,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그저 착실히 신앙생활만 하는 사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착한 신자’들일 수 있다. 물론 그런 신자들이 다수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런 모습을 초극하는 신자들도 많다.

자기 신앙의 잣대로 예수님의 삶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이 가신 길보다는 자신의 노선에 우선 가치를 두고,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 예수님을 끌어들이고, 예수님의 길이 아닌 길을 예수님의 길이라고 강변하곤 한다.

사회 지도층이나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고, 일반 신자들 가운데도 그런 성격의 신자들이 꽤 많다. 일반 신자들의 그런 현상을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이버 상에는 기기묘묘한 사람들이 다 있다. 한 입을 가지고 두 가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성인들의 삶을 소개하며 고결한 말을 읊조리던 입으로 마구 욕설을 하고 저주를 한다. 자신은 할 말 못할 말 다하면서 남의 말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자신이 한 언행은 까맣게 잊고 남의 언행을 평가하고 비난한다. 자신의 잣대로만 옳고 그름을 나누고, 누군가가 자신의 잣대를 비판하면 악마라고 하며 저주를 퍼붓는다.

제법 그럴듯하지만 판에 박힌 빤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자신의 지식이나 신앙심이 사제들과 주교보다 우위인 것처럼 강변하는 신자들도 있다. 심지어는 사제와 주교에게 욕설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랑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사용하니 정보화 시대를 구가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는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4대강 파괴를 비롯한 어떤 환경 파괴도 다 하느님 뜻이다. 군비 증강도, 재벌 위주 정책도, 노동 착취와 노동자 탄압도 모두 하느님 뜻이다.

그들에게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사탄의 술수’다.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소신대로 충실히 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에 발 벗고 나서고 국민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덕목이라는 말도 한다.

예수님의 길을 부정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들은 자신이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차 있다. 사이버 상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일지 모른다. 그런 신자들은 사실 많고도 많을 것이다. 오죽하면 미사 중 강론을 하는 사제에게 벌떡 일어나 항의를 하는 신자도 있을까.

교회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교회가 이 지경을 된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신자 아닌 신자들을 바르게 계도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참으로 교회의 책임이 크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가장 큰 교구인 서울대교구가 새 교구장을 맞게 된다. 여러 가지 쇄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교회가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지요하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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