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으악!” “와장창!” 비명과 함께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놀라서 뛰어가보니 계단 밑에 청년이 쓰러져 있다. 옆에는 유리 파편과 약물에 흥건하게 젖은 종이 상자가 널부러져 있다. 지하 주차장에서 7층 옥상의 약품창고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일일이 수액상자를 어깨에 지고 계단을 오르다 휘청하며 넘어진 것같다. 40킬로램이나 나가는 유리병이 덮쳤으니 대형사고다.

청년을 진료실로 옮겼다.유리파편이 손바닥과 얼굴을 찢고 들어가 출혈이 심한데다 허리와 무릎뼈에 손상이 갔는지 꼼짝달싹을 못한다.

그날 처음 알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약품창고에서 만나는 사이인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투명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청년의 이름은 우현수. 나이 21살. 약품배달을 하는 택배 알바생이다. 사고가 난 날은 운이 없었다. 항상 2인1조로 일을 하는데 같이 일하던 동료가 전날 그만둬서 혼자 무리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청년은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문제는 깨진 약품의 손해배상이다. 전적으로 청년의 책임일 텐데 금액이 만만치 않다. 고가의 항생제와 영양주사액은 청년이 한달 꼬박 일해서 버는 알바비로는 턱도 안된다.

며칠후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푸석푸석하게 부은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데 거동이 불편해보인다. 옆에는 손녀로 보이는 자그마한 초등학생이 할머니의 팔을 꼬옥 붙들고 서있다. “손자땜에 왔어요.” 청년의 외할머니다.

현수는 서울시내의 대학교 2학년생, 휴학중이다. 부모님은 이혼후 소식이 끊긴지 오래고 외할머니 혼자 현수와 두 동생을 키웠다. 현수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지만 일찍 철이 들어 공부를 꽤 잘해서 외할머니의 희망이었다. 장학생으로 대학에 갔지만 알바 때문에 성적이 떨어져서 2학년에는 장학금 혜택을 못 받았다. 신부전증으로 신장투석을 받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생활비와 등록금 게다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동생의 학비까지 전부 현수의 어깨를 누르는 짐이다. 편의점, 신문배달, 학습지도, 피씨방 알바를 거쳐 결국 휴학을 하고 생계에 뛰어든 것이 택배 일이다.

사고후 병원은 제약회사에게 제약회사는 택배회사에 책임을 물었고, 결국 택배기사인 현수에게 책임이 돌아갔다. 손해배상비와 현수의 치료비까지 갚으려면 지금 현수네가 살고 있는 월세방의 보증금 천만원을 빼야한다. 그날 할머니는 하소연을 하러 오셨다.

나는 비로소 웃음기 없는 현수의 얼굴과 축 처진 어깨, 지친 눈동자가 떠올랐다. 공부까지 포기한 스물한 살의 어린 가장의 어깨위에는 자식을 버리고 떠난 부모의 뒤틀린 인생과 늙고 병든 육신을 끌고 식당 일과 청소 일로 손주 셋을 키운 할머니의 고통, 대를 물려 떠맡은 자식으로서의 짐, 아직은 순수한 어린 동생들의 꿈, 가족이 있었다.

할머니의 긴 이야기를 듣고 그날 밤 나는 세 통의 편지를 썼다. 제약회사, 택배회사, 병원장에게 쓴 진심을 담은 ‘호소문’이었다.

제약회사 사장님에게는 등록금과 생계와 알바에 허덕이는 현수 같은 청년을 도와주십사, 택배회사 담당자에게는 2인1조의 근무조건을 어겼으니 절반의 책임이 있다는 이의제기를 하고, 병원장에게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그날의 상황과 함께 깨진 약품처리를 병원 차원에서 해결해 주길 호소했다.

글의 힘은 컸다. 며칠후 현수가 환한 얼굴로 호두과자를 사들고 찾아 왔다. 해바라기 같은 미소였다. 제약회사로 부터 장학금을 받고 복학하게 되었으며, 택배회사는 특별히 주말 알바직을 현수에게 배정해줘서 생활비까지 해결하게 되었다며 꾸벅 절을 한다.

현수가 좋아하는 운동은 엉뚱하게도 역도라고한다. 삶을 ‘짐’으로 여겨서일까? 자기 체중의 너덧배에 가까운 무게를 들어올리기 위해 온 몸을 내리누르는 중력에 홀연히 맞서는 힘 때문일까? 무거운 숙명을 맨몸뚱아리 하나로 맞서기 위해 오직 성실과 인내로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현실을 일찍 터득해서일까? 바벨은 무겁다. 하지만 들면 들수록 무게를 견딜만큼 근육이 만들어지고 관절이 강화된다. 천근만근의 쇳덩이가 깃털처럼 가벼워질때까지 침묵과 집중속에서 자신을 벼리는 일, 그것이 역도다. 삶도 마찬가지다. 태산 같은 짐 앞에서 누구나 아득해진다.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현수는 바벨을 들어올리면서 터득했을 것이다. 현수가 바벨을 들고 외치는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 “으랏차차!”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