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어의 ‘급진적 은총’(Radical Grace)-7]

▲ <The Joy of Life>, Robert Delaunay(1930)

 

 

 

 

 

 

 

 

 
예루살렘의 난민들에게 연설한 스바니야와
감옥에 갇힌 몸으로 필립비 교회에 편지를 보낸 바울로는
불가사의한 기쁨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를 옹근 전체와 성결함으로 부르고 있는 그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감정의 폭을 크게 초월하여,
순종함으로써 기쁨을 길어 맛보게 하는 깊은 우물을 가리킨다.

그 기쁨이 결국은 하나의 결단이요 선택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줄 근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기쁨이란 또 다른 객관적 ‘현존’이자 사랑 자체인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곧 기쁨이다.

사랑 안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자유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주님은 우리를,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돌아오는 적합한 보상에 대한 사랑 너머로 인도하신다.

우리에게는 기쁨을 알아보라는, 그것을 믿고 의지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감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로써 진실하고 심오한 기쁨의 확실한 저장고가 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이 말한 “성령과 불로 받는 세례”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물 세례처럼, 스스로 만들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과 사모함과 믿음으로만 받게 되는 세례다.

요한의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기대로 충만해졌다.”(루카 3,15)는 기록을 우리는 읽는다.
그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기쁨에 기울어져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이들은 기쁨과 함께,
그것이 어디에서나 가능한 것임을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기쁨에 내어맡긴다.
기쁨에 공간을 마련해주는 사람,
기쁨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
그 옹근 현실을 갈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난민들에게, 빈민들에게, 슬픈 수인(囚人)들에게, 성난 예언자들에게
그것을 겁 없이 선포해야 한다.
아울러 자신에게도 자주 일러주어야 한다.

이토록 냉소적이고 약아빠진 세속의 감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기쁨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from Sojourners, ‘Baptism of Joy’)

* 이 글은 '드림'에서 발행하는 <풍경소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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