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강론대-5월 20일] 마르 16,15-20. 사도 1,1-11

오늘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로 가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생존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안에 계속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은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활과 승천을 분리해서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세 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과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죽은 이들이 가는 땅속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된 우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우주관을 전제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땅속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곧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승천하셨다고 보도합니다. 루카 복음서의 저자가 그 후편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했습니다. 저자는 루카 복음서의 말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고, 그들을 베타니아로 데리고 나가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40일 후,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같은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해 이렇게 다른 기록을 남겼을 때는 승천의 일시와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흗날에 부활하셨다는 말은 돌아가시고 72시간 후에 부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사흘은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결정적인 날에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40일은 사람이 자세를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는 사도행전의 말은 그것이 뜻하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쳤던 제자들이 전향하여 그분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기까지는 어떤 기간을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현하여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과 함께 계신다고 믿는 제자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다는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하늘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하늘에 빌고, 하늘을 우러러 반성하고, 푸르고 넓은 하늘을 보면서 답답한 가슴을 달래며 살았습니다. 오늘 대도시에 사는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볼 여유도 없이 우리 삶의 일상 쳇바퀴에 갇혀 삽니다. 넓고 푸른 하늘,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 만큼,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도 우리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삶에 숙연함을 주는 체험이 사라졌습니다. 넘쳐나는 인간의 생산품에 시선을 빼앗기고, 정보매체들이 전하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우리는 분주하게, 또 고달프게 삽니다. 하늘을 우러러 생각할 겨를도 없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여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삶이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하늘이 우리의 삶에 의미하는 바가 있듯이 우리가 묻혀 사는 일상적 일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의 삶에 있다고 말합니다. 넓고 푸른 하늘,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하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하늘입니다.

그런 하늘이 우리의 삶에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넓고 신선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병자들을 고쳐서 삶의 현장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장애를 넘어 새롭게 살았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등을 향한 욕망이 우리를 실의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 들의 백합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욕망에 허덕이지 말고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넓은 시야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 선고를 내린 유대인 최고 의회 의원들과 형을 집행한 총독 빌라도는 이 세상의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패배자로 죽어가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사람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겪는 실패 안에서도 일하십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신앙인들 안에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은 그분의 죽음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 사랑과 섬김은 신앙인들의 삶 안에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움을 체험한 바오로 사도의 외침입니다. 예수님 안에 새로운 하느님을 체험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 앞에 지키고 바쳐 자기 한 사람 잘되어 보겠다던 우리의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그 사랑을 실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 가난하고 울어도,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승천은 예수님이 높은 데로 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도 않고, 예수님과 하느님을 빙자하여 높다고 행세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모든 사람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우리 삶의 허무를 넘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하늘과 예수님은 겹쳐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빌듯이 예수님에게 빌고,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예수님을 우러러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또 새롭게 해주는 분으로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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