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공동체 이야기-2]

들판은 괴로워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른 봄이라 아직 땅은 쟁기의 맛을 보지 못하고 있었고 돌보지 않은채 내버려져 있었다. 풍요의 희망도, 이 해에 곡식을 제대로 얻으리라는 약속도 느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집도 변덕스러운 기후에 시달리고, 페인트칠이 안된 나무판자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농장의 모습은 흘낏 볼 때는 그림같이 아름다웠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내려앉은 지붕과 느슨해져서 삐걱거리는 문짝들 때문에 낡은 모습이 금방 눈에 띈다. 가끔 햇빛이 비치는 건조탑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시라쿠즈의 길거리에서 어렵게 살았던 사람들이 모인 가정 … '일치의 농장'

▲ <Autumn in America, Oneida County, New York>, Albert Bierstadt
실업율이 높은 이 지역에, 농장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운 이곳에 '일치의 농장'이 있다. 이 농장은 2번 주 도로 거의 끝에 6~8개의 하얀나무 집들이 아무렇게나 한 데 모여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일치의 농장은 이런집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일치의 농장은 가정인 것이다. 시라쿠즈의 길거리에서 어렵게 살았던 사람들, 감옥과 보호소에서 힘들게 살아온 약 백 명의 남자들이 살고 있는 가정이다.

한 때는 전문적인 오르간 주자였던 레오는 이 집에서 매일 전례 때 오르간을 치며 살고 있다. 또 “모든 사람을 돌보고 있는” 80대의 나이든 흑인 노인네도 살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과 다시 살아볼 용기를 얻을 때까지 임시로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데 어울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농장은 예전에는 유기된 요양소였는데 가구나 기타 설비는 매우 소박하다. 그러나 이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정신과 풍요로움은 온 집안에 넘쳐 흐르고 있다. 허크 티보가 그 한 사례인 사람이다. 10년 전 허크는 시라쿠즈의 가게를 포기하고 이 농장에 봉사자로 이사해 왔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나 봉사에 대하여 일체 말이 없었으나, 이웃의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제 누님이 저를 이곳에 오게 했지요. 이곳 사람들이 시라쿠즈에 살고 있을 때 제 누님은 청소하고 빨래를 해주곤 했지요. … 그래서 저는 제 차로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지요. 그들을 시내에서 데려다가 바람을 쏘여주곤 했고요.”

허크는 말했다. “그저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거지요.” 그의 대답은, 깊숙히 있는 그의 저의는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든가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허크는 케이트 스탠튼을 가리켰다. “케이트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신앙이 깊을 수가 없지요!” 케이트는 땅딸막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인이다. 그는 1966년 시라쿠즈에 첫번째 가톨릭 일꾼운동공동체가 생겼을 때부터 함께해 왔다. 시라쿠즈 시내의 한 본당인 루시 성당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목을 하고 있었던 레이 맥베이 신부를 처음 만났을때는 이런 일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레이 신부가 그를 격려했고 케이트는 곧 그 첫 번째 집 한 구석에서 20여 명의 약물·알콜 중독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들이 비좁은 시내 집을 떠나 공기 좋은 시골로 떠나왔을 때 케이트도 함께 왔다.

“19년이 지난 지금 난 정말 편안합니다. 그전에는 공장에서 일했었는데 등을 다쳤지요. 그래서 일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주님께서 저를 돌봐주셨지요. 난 루시 성당에서 레지오마리애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혼자 돌아다닐 수가 없었거든요. 한두 모임에 나가보다가 레이 신부님이 저를 발견했어요. 그때 나는 너무나 허전했지요. 무언가 찾고 있었지만 그게 무언지 몰랐거든요. 이 집에 길게 머물수록 기분이 좋아졌지요. 그리고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나 이 집에 왔을 때 나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준비해 왔구나 하는 걸 깨달았지요.”

그렇다고 이 일치의 농장 생활이 순전히 희열만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정말로 그 사람에게 투신하지 않으면 함께 살 수가 없지요.” 이 농장은 시라쿠즈로부터 38마일 떨어져 있었고 오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독에 시달렸기에 제대로 치료를 받자면 자주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케이트와 레이 신부는 하루종일 돈 걱정을 하고 약을 투약하며 전화 받고 미사 봉헌하는 일,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등 온갖 일로 바쁘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요구를 들어주고 그들의 걱정과 두려움, 고통과 기쁨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레이 신부는 그에게 쏟아지는 수천 개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이야기한다.

“난 절대로 일정이나 계획 짜는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도대체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저 순간순간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머지는 걱정하지 않는 거지요.”

그는 월요일을 쉬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약간의 독서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시라쿠즈 시내로 나가 병원이나 양로원에 있는 식구들을 방문한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중의 하나는 그렇게 끊임없이 생겨나는 많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레이 신부와 케이트에게서 웃음이 떠나지 않으며 소모적인 생활 속에서 겪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일, 그리고 때로는 괴이한 일까지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주는 편안한 농담으로 그들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케이트는 이 농장에 와서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머물고 있다. 그는 여기 식구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어떨 때는 무척 어렵기도 하지요. 나는 그저 노력할 따름입니다. 어떤 조건을 붙이려고 하지 않지만 때로는 힘들어요.”

레이 신부는 자그마한 사람이다. 헐거운 스웨터와 작업복을 입고 있다. 그는 본당 신부라기보다 이 공동체의 일원처럼 보인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을 하기에 편리한 복장을 하고 있다. 블랙커피를 연거푸 마시고 시가를 끊임없이 피워물고 있다. 그의 얼굴과 몸짓을 보고 있으면 대가족의 엄마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기희생적인, 이웃을 위해 살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이 느껴진다. 마치 자신의 요구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레이 신부는 몬트리올의 베네딕트 라브레 집에 있는 토니 윌쉬를 기억한다. 토니는 레이 신부의 초기 신부  시절에 “하느님 은총의 도구”가 되었다. 토니의 영향 때문에 레이 신부는 “우리들의 상처받고 부서지고 소외된 형제자매들과” 함께 사는 생활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 일꾼운동은 그 후에 알게 되었다.

도로시 데이 "절대 성공 못할 것이라 말한 내 혀를 얼마나 여러 번 깨물고 싶었는지……."

▲ 도로시 데이
케이트는 도로시와 이야기 나누기 위해 수 차례 뉴욕시로 가곤 했다. 케이트와 레이 신부는 도로시의 생각이 그들 생각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알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단순성 때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요. 관리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저 단순하게 복음에 충실하는 것 등 말입니다.”

농장 이야기를 도로시에게 했을 때 그는 “당신네들은 얼간이 같아요. 그 농장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에 도로시가 농장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그렇게 말한 내 혀를 얼마나 여러 번 깨물고 싶었는지 몰라요.”

어리석은 공동체의 시작 … 성실한 사람들의 관대함으로 채워졌던 요구

레이 신부는 이 “어리석은 공동체의 시작을 기억한다. 루시 성당의 청소년센터에 설치된 일치의 한 구석이 첫 번째 시도였다. 그리고 나서 2500불 짜리 나그네의 집이 마련됐다. 첫 번째 식구는 히로인 중독자였다. 그 집은 어떤 요구든지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집은 사람들로 꽉 찼지요. 우리는 거실에 3층으로 잠자리를 마련했지요. 제일 윗층의 침대에서 술 취한 사람이 떨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졌는데 너무 조용하게 있어서 아침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적도 있어요. 한 번은 돈은 다 떨어지고 그저 30명의 남자가 집 가득히 앉아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캐롤과 베리간에게 전화하고 배가 고프다고 했지요.”

그들은 즉시 달려와 본당에서 팀을 조직하여 음식을 준비하고 식구들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같이 넘치는 많은 사람들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시라쿠즈시의 알콜·약물 중독과 폭력은 레이 신부가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증가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후퇴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리고 나와 함께 봉사할 사람들을 초대했지요.” “우리는 1958년 이래 문을 닫고 있는 한 결핵요양소 주인에게 18,000불을 주기로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었어요. 그러자 한 친구 신부가 7,000불을 대부해 주었고 겨우 계약을 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하여 일치의 농장이 시작됐다. 다섯 사람이 레이 신부와 함께 시내 집에서 농장으로 옮겨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65명의 식구로 불어났다. “어떤 때는 210명이 함께 산 적도 있었지요.” 초기에는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도 함께 살았었다. 그러나 너무 어려워서 남자들만 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단독집과 이동식 주거가 점차 마련되어 가족들도 인근에서 살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가족들은 주일미사를 함께 지내고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다.

식구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 일용할 양식과 의복, 난방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런 요구들은 정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성실한 사람들의 관대함 때문에 기적적으로 채워지고 있다.

식구들이 받는 사회보장 기금 절반, 마더 데레사에게 보내

이곳의 식구들은 대부분이 아주 적은 사회보장혜택 기금을 받고 있지만 유지비를 부담하도록 요청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 대부분이 시라쿠즈에 나갈 때마다 술을 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케이트와 레이 신부는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들이 받는 보장기금의 반을 일치의 농장이 아니라 인도의 마더 데레사에게 보내자는 생각이었다. 많은 식구가 동의했고 그들은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케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마더 데레사에게 수표를 보내기 시작한 이후로 우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요.”

기적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이 상처 받은 개인들의 집단으로부터 그처럼 감동적인 응답을 이끌어 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식구들이 이렇게 대답한다. “레이 신부님은 정말 큰 사람이지요. 그는 욕심이 없어요. 신부님은 성인입니다. 어떤때는 이 집에 11명의 살인범들이 있기도 했지요. 신부님이 그들에게 말했더니 … 이 집에 폭력이 없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인 던은 이곳에 오래 살고 있는 수행자이고 목수이며 낙수대 설치가이기도 하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난 정말 못된 놈이었지요. 내 머리칼은 등까지 내려왔고요. 시라쿠즈의 거리에서 6개월을 헤매다 보니까 내 담당 경찰이 여기에 데려다 줬지요. 내가 어떻게 변했냐고요? 케이트와 신부님 때문이지요. 그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나를 바꾸어 놓고 말았어요.”

레이 신부가 보충해서 말했다. “던, 당신은 우리한테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기적들이 있다. 그 대부분의 기적들은 식구들의 인간성에 대한 레이 신부의 민감함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그는 식구들의 선함을 끌어내어 들어올리고 그들이 서로를 돌보도록 북돋워준다.

카를로스가 좋은 예이다. 그는 영어 한마디 모르면서 이곳에 왔다. 그는 좋지 않은 농담을 지껄이며 혼자 고립되어 한참을 지냈고 스페인어로 투덜거리곤 했다.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스페인어를 약간 알고 있어 카를로스에게 달라 붙었지요.” 그는 카를로스의 방어적인 자세를 깨뜨리고 그를 자신으로부터 끄집어 냈다. “그는 카를로스를 식당에서 일하게 했고 낚시에 흥미를 갖게 했어요. 이제 카를로스는 아주 행복하고 다른 식구들과 잘 어울립니다. 그에게는 식당 일과 낚시가 전부입니다.”

쇼티가 또 하나의 기적 이야기를 만들었다. 1970년에 그를 담당한 사회사업가가 도움을 청했다. 아기 때 랜달섬에 버려진 쇼티는 49년 동안 주립학교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풀려나면 다음 장소는 감옥일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 신부와 케이트가 그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를 아들처럼 대했죠.“ 레이 신부가 말한다. ”그는 보석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할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모든 것을 한다. 매일 미사 때 복사로부터 정원 가꾸는 일, 심부름과 운영위원회 참여, 손님 맞이 등 그의 열성은 정말 선물이다.

쇼티의 행복은 5년 전 사회사업가와 컴퓨터가 팀이 되어 그의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을 때 완성됐다. 오랜 기간의 외로움이 끝났다. 기적적으로 성토요일에 한 명도 아닌 26명의 친척이 발굴되었을 때 쇼티가 결코 알지 못했던 가정의 부활이 일어났던 것이다. 쇼티는 그가 축복받은 사람임을 알고 있다. 그의 형제와 누이, 조카들은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랑스럽게 그들의 사진을 자신의 작은 방에 진열해 두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들어와서 제 가족들을 보세요“라고 말한다.

잔잔한 열정을 가진 레이 신부는 사회가 두려워하고 피하는 쇼티와 그 외의 다른 식구들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되돌아본다. 이곳에서 그들은 억압으로부터 여유와 자유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를 다시 발견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숨어 왔지요.“ 바틀리가 자신이 쓴 시 <여정>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젊은 청년으로 열정이 넘치는 아일랜드인이다. 그는 성령에 밀리어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무신론, 동방의 신비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를 편력하는 어렵고 긴 방황 끝에 1980년 겨울, 그는 회심했다. 이제 가톨릭교회로 굳건히 돌아선 바틀리는 이 농장에서 자신의 영혼이 점차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 그는 말한다. ”그래요, 나는 이제 집에 돌아왔지요. 나는 하느님의 품안에 들어섰어요.“ 자연스럽게 그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레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순수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그는 교회가 손을 뻗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하지요. 당신은 그 열매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매우 영적인 사람이지요.“

나는 영원이 평온이라는 것을 압니다.
또 그 고요함이 이웃의 아픔에 귀기울임으로써만
얻어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계속할 겁니다.
분명히 나는 계속 귀를 기울일 겁니다.

- <여정>에서

이 일치의 농장은 계속될 것인가? 레이 신부는 말한다.

“이 근래 몇 년동안 이곳 식구들의 사기는 놀랄만 합니다. 그 사기를 지탱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겐 충분한 휴식이 없지만, 모두 잘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이곳에 좋은 정신을 뿌리박을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지요. 대부분의 식구들이 이제 나이 들고 병들었습니다. …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는 일할 필요가 있어요.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마련하실 겁니다. 그분은 적당한 사람을 찾아주실 것이고 우리는 계속할 겁니다.”

일치의 농장은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좋은 식사, 각자의 방, 인생의 역경 한가운데서 숨쉴 수 있는 공간이며 가정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 가난한 이들은 부담이나 도전 혹은 봉사 대상 이상이 된다. 이곳에서 각자는 사랑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것이다. 이곳에서 죠는 자랑스럽게 그의 돼지를 보살피고 가축 기르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이웃과 나누려고 열심이다. 쇼티는 꽃과 나무들로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하여 땅을 일구고 있다. 레오는 낡은 오르간으로 부드러운 음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열심히 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다른 서너 명의 식구는 톱과 나무로 조화를 이루며 밖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돌보지요.” 공동체의 주방장이며 생일 케이크를 계속 구어내고 있는 헬렌 크라크가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주시하고 있어요. 그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들판처럼 지금은 식구들에게 어려운 때이다. 그렇지만 식구들은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일치의 농장에 사랑의 씨가 뿌려지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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