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야훼, 나의 하느님!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나를 뒤쫓는 모든 자들에게서
구하시고 살려 주소서.
사자처럼 달려들어 이 목숨 발기발기 찢어도
살려줄 자 어디 있사옵니까?

야훼, 나의 하느님! 아무러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이 손으로 받지 못할 것을 받기라도 했다면,
친구에게 선을 악으로 갚기라도 했다면,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살려주기라도 했다면
원수들이 이 몸을 따라 잡아 밟아 죽여도 좋사옵니다.
창자가 터져 흙범벅이 되어도 좋사옵니다.

야훼여! 의분을 일으켜 일어나소서. 미쳐 날뛰는 원수들의 기를 꺾어 주소서.
나의 하느님! 일어나시어 판결을 내려 주소서.
만민을 한자리에 모으시고 그 가운데 높다랗게 자리 잡으소서.
민족들의 재판관이신 야훼여, 이 몸은 아무 허물이 없사오니,
야훼여, 바른 판결을 내려 주소서.

사람의 마음 속, 뱃속을 헤쳐 보시는 공정하시는 하느님,
악한 자들이 다시는 설치지 못하게 하시고 무죄한 사람들은 뒷받침해 주소서.
더없이 높으신 하느님은 나의 방패, 올바른 사람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
나의 하느님은 공정한 재판관, 언제라도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저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칼을 갈고 화살 메워 시위를 당겼다가
죽음의 칼을 들고 활촉에 불붙여 겨누신다.

악한 생각 빚어서 몸 속에 사악을 품었다가 속임수를 낳는 원수들아!
너희가 구덩이는 깊숙이 팠다마는 그 구덩이에 너희 자신이 빠지리라.
제가 꾸민 재난이 제 머리에 떨어지고 그 폭력은 제 정수리에 떨어지리라.
나 공정하신 야훼를 찬양하고 지존하신 그 이름, 야훼를 노래하리라.

(시편 7장)

방에 가만 앉아 있는데 창밖으로 낯선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아랫집 개가 또 지나가고 노랑나비 여럿 팔랑거리면서 날아간다. 아침 태양은 누가 보건 말건 정오를 지나 저녁으로 아득히 기울고 있다. 내가 지워지고 없어진대도 이처럼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 법이렷다. 그러니 조급한 마음일랑 접고 제 생각으로 도망치던 발길도 되돌려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해 고쳐 걸어가야 한다. 주님의 사람이 되어 살아갈 때 영원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세계는 주님이 이끄시는 불마차요 꽃마차다. 마차에 탄 이는 두려움을 떨치고 주님께 온전히 목숨까지도 내맡겨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실 ‘길눈 밝은 운전사’가 아닌가. 운전을 내가 한다는 생각, 우리가 한다는 아상은 그야말로 망상임이 분명하다. 주님이 나와 우리를 이끌고 계심을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이요 순리다. 주님이 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운전대를 사양하고 양보해야 한다. 그게 길눈 어두운 사람이 목숨 부지하며 살 길인 게다.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당신이 직접 심판관이 되려하지 말기를. 누렇게 마른 입술로 그대가 내뱉는 모든 고충과 부당한 경우들, 이미 주님은 낱낱이 알고 계시며 세세한 차후 방책까지도 준비하고 계심은 물론이다.

7장에는 공정이란 말, 공의란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온다. 법원 앞에 세워진 정의의 신상은 오른손에 심판의 검, 왼손엔 공정한 저울을 들고 있다. 야훼께서는 가짜 저울을 역겨워하시고 바른 저울추를 좋아하신다(잠언 11,1). 정의로운 재판관(엘로힘 쇼페트 짜딕)은 반드시 억울한 일로 고통당하는 당신의 신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야곱을 부르실 때도 주님은 “내가 뽑아 세운 여수룬아!”이렇게 호명하셨다(이사 44,2). '여수룬'이란 ‘의로운 자’라는 뜻, 공정한 저울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사람은 의로운 재판관이 됨은 물론이고 정의로운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 세상에서 누명을 쓴 이들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반란죄로 갇힌 이들의 편에 서며 그들과 어깨동무하는 일이야말로 여수룬에게 맡겨진 첫 번째 사명이다.

악을 이기고 근절하는 방법은 '공정한 재판'과 함께 ‘선한 일’을 도모하는 방법뿐이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7). 주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셈법과 달라야 한다. 불의에 저항하고 투쟁하되 보복, 복수는 주님의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사람들은 선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모든 행성이 태양을 회전하며 의존하고 있지만 정작 태양은 우주에서는 전혀 할 일이 없다는 듯이 포도송이를 달게 여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갈릴레오 갈릴레이) 주님의 사람들은 마치 저 태양이 그러한 것처럼 주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만 몰두하고 몰입해야 한다. 단죄와 심판을 넘어서서 성령의 열매가 가득 맺히는 울창한 여름날의 과실나무…….

사막의 교부인 아가톤 형제는 침묵을 수련하기 위해 3년 동안이나 입에 재갈을 물고 움막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정도 무겁고 진중한 각오를 하고서 마음을 다진다면 세상은 정의로 가득 찰 것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재판들로 잡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기득권층 편에 선 정치검찰은 세상을 도둑들보다 더 어지럽히고 있는 형국이다. 자기 멋대로 저울을 속이는 사법당국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악한 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설치는데 그들이 활개치도록 외려 내버려두고 힘없고 무죄한 사람들이나 붙잡아 눈물 흘리게 하는 현실……. 시인의 가슴은 피멍이 드는 게다.

예수 또한 불공정한 재판의 희생양이었다. 사랑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가슴을 열지 않았다. 진실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익숙한 거짓을 고집하며 진실을 내쫓았다. 아무 죄도 없으신 그분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형편없는 법으로 단죄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사법살인까지 저지른 우리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며 법치는 실종된 지 오래, 공정한 저울 눈금을 찾을 길이 없다는 민중의 아우성이다. 정의가 한 줌도 없이 사라진 안갯속에서 절망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언덕 너머로까지 달음질치고 있다.

정의의 모범과 선봉이 되어야 할 교회가 도리어 부정한 저울을 강요하고, 복음의 일차적 전달 대상자인 가난한 백성을 외면하며 노예처럼 괴롭혀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주민들을 지배, 조종하려 들고 물리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던 과거는 부끄러운 교회사의 민낯이다. 교회의 저울 눈금은 오로지 주님의 말씀이며 세상의 가치와 서열, 계급이 소용없는 해방구가 교회여야 한다. 공정, 공의, 정의, 진실이 콸콸 샘솟는 샘터에서 아이들이 자란다면 그게 이미 하늘나라가 아니겠나.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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