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강론-4월 5일] 요한 13,1-15. 1고린 11,23-26.

오늘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이별의 만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만찬 중에 유언으로 성찬의례를 남기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 1서는 그 성찬의례를 소개합니다. 예수께서는 빵과 잔을 각각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의례로써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이 살아계실 때, 실천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자기들도 기억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고린토서는 이어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식탁에서 남긴 성찬 의례가 오늘 우리의 미사입니다. 우리는 미사, 곧 성찬으로 주님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기억하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또 우리의 어떤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잃기까지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미사에서 먼저 그분으로 말생한 이야기들이 담긴 신약성서를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라 부르는 빵을 먹고, 피라 부르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님이 가지셨던 인간관계와 그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하며 살겠다고 마음다짐 합니다. 몸은 인간관계를 뜻하고 피는 생명을 뜻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중심으로 열리는 좁은 시야(視野) 안에서 삽니다. 그 시야에는 물질 혹은 재물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착시(錯視) 현상도 있고, 자기 자신만이 확장되어 보이는 과대망상 현상도 있습니다. 그 시야 안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에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소중히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내 생명이고, 내 이웃들입니다. 그 베푸심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진리를 꿰뚫어 보며, 완전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생존이 어떤 베푸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내어 기뻐하는 목자와 같으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는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워 우리도 그것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의가 담긴 호칭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이 유언으로 남긴 성찬에는 당신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당신의 피라는 잔을 마시면서, 그분의 삶을 실천하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서가 말하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최후만찬 식탁에 앉으셨다는 것만 말하고,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복음서는 식탁에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신 말씀들을 생략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과 고린토1서가 이미 예수님이 성찬을 세우셨다고 말하였고, 모든 신앙공동체들은 성찬을 이미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신 이야기를 새삼 반복하며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 복음서는 성찬이 지닌 의미를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식탁이 있는 곳은 음식을 먹는 장소이지 발을 씻기 위한 공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예수님이 최후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고 말합니다.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이나 노예의 몫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남긴 성찬이 우리를 이렇게 겸손한 섬김의 실천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계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고 말하면서 완강히 사양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받지 못한다.’ 종과 같이 섬기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계약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발 씻음이 의미하는 종과 같은 섬김에 참여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몫, 곧 하느님의 자녀 됨을 나누어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도 아니고, 우리를 위대하게 해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받는 영광스런 신분을 주지도 않습니다. 성찬, 곧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는 우리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으로 부릅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이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새로운 계약, 곧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세례자 요한이 “저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고 고백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가 실천으로 고백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실천하신 섬김의 일은 우리 안에 커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은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섬김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섬김은 커져야 하고, 우리 자신은 작아져야 합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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