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임의진
야훼여! 아뢰옵나니 귀를 기울이소서. 내 한숨짓는
까닭을 알아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느님이여!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모르는 체 마소서.
당신께 기도 드립니다.
야훼여, 당신은 아침 기도를 들어주시기에
이른 아침부터 제물 차려놓고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사악을 좋아하실 리 없사오니,
악인을 반기실 리 또한 없으십니다.
거만한 자를 당신께서는 참고 보지 못하시고
악한 짓 하는 자 모두 미워하십니다.
거짓말쟁이를 멸하시며 피에 주린 자, 사기치는 자를 역겨워하십니다.
당신의 크신 사랑만을 믿고 나는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주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하여 엎드립니다.
야훼여! 원수들이 지켜보고 있사오니 이 몸에서 죄를 벗겨주시고 당신 길을 내 앞에 터주소서.
저들의 말은 하나도 믿을 것이 없사옵니다.
속에는 악한 생각뿐이며 혀는 그럴듯하게 놀리지만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하느님이여, 그들을 벌하소서.
제 꾀에 걸려 넘어지게 하소서.
수없이 범죄하는 자들, 주께 반역하는 무리들, 이들을 쫓아내소서.
당신께 피신하는 자 모두모두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겁게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 받드는 자 모두 지켜주시고 당신 품에서 흥겹게 하소서.
야훼여! 당신은 의인에게 복을 내리시며 사랑으로 방패삼아 그를 지켜주십니다.
(시편 5장)


옛 이집트엔 ‘호곡꾼’이라 하여, 곡소리를 전문으로 하며 슬픈 일을 당한 집에 찾아가 위로해 주고 생계를 잇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반주 악기로 '네힐로트'라는 피리, 관악기를 썼는데, 이 악기론 황홀경에 빠진 예언자들도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사무엘상 10, 5)

시편 5장은 떠돌뱅이 악사의 피리 소리로 시작된다. 이 바람소리는 지난겨울 찬바람 쌩쌩부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불어오는 영의 바람 ‘루아흐’(요한 3, 8/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서지만 히브리어로 쓰였다면 아마도 루아흐를 사용했을 것)’로 공명하는 피리소리다.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나리꽃(아가 2,1)을 깨우는 맑고 푸른 봄바람소리다.

봄날 아침 무릎을 모으고 기도하는 시인. 주님은 시인의 아침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가 부활한 아침(마태 28,1; 마르 16, 2; 루카 24, 1; 요한 20, 1)도 이처럼 희망의 시간이었으리라. 새벽 여명의 시간 ‘보케르’는 욕심을 다해 사용하지 않은 시간, 오로지 마음을 비우고, 내 것이 아닌 모두의 시간이요 온전히 주님의 시간이렷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내'것이 아니다
온세상 모두의 것이다

-권정생 시, ‘밭 한 뙈기’에서

그렇다. 무엇을 내 것이라 하는 순간 죄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건도 내 것이 아니듯 시간도 내 시간은 없다. 귀한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것, 바로 그것이 예배요 기도시간이다. 예배는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세상에서 볼 때는 낭비 같겠지만, 그것은 거룩한 낭비요 영혼을 살리는 쉼과 묵상의 시간이다.

에덴동산에서 공동소유물로 지정한 과일나무를 몰래 둘이서 사유화하고, 내곡동 땅을 몰래 자기들 앞으로 등기한 아무개처럼, 그리고선 시치미를 뚝 떼던 첫사람 부부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은 모두의 시간, 모두의 공간을 즐기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로 에덴을 임의대로 사용했다. 에덴공동체를 사유화한 그들마냥 교회를 사유화하고 교권을 독점하고 구원마저도 오직 자기 교단을 경유해야 한다며 거짓부렁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니는 자들이다.

성서에서 때를 가르키는 ‘에트’는 행복을 가져오는 시간(시편 18, 16)이기도 하고 때론 불행이 닥치는 시간(전도서 9, 11)에 쓰이기도 한다. 모두를 위해 살 때 행복이 오고 나를 위해 살면 반드시 불행이 닥쳐온다. 정의의 편에 선 사람은 아침 제물을 차려놓고 주님께 기도하며 오로지 주님의 처우만을 바란다. 귀를 기울이며 듣고 답하다는 뜻의 ‘아잔’은 주님의 귀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한시도 귀를 떼지 않으신다. 주의 앞, ‘네게드’에 마음이 오만한 자는 결코 설 수 없다. ‘할랄’이 분사로 쓰일 때는 거만하고 교만한자로 사용된다. 이 오만한 자는 떵떵거리며 안하무인인 권력자와 부자를 가리킨다. 주님은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시는가? “가엾은 사람(개역: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야훼, 들으시고”... 제 오니 카라 바 아도나이 샤메아... (시편 34, 6)

한편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베이르아테가’, 엎드려 울며 간곡하게 기도해야 한다. (7절) ‘이르아’라는 말은 떨고 전율하며 경배하는 ‘야레’에서 비롯된 말이다. ‘떨고 울면서’(샤부이) (2절)기도할 때 주님은 사랑, 은혜, 은총, 은택, 선의로 번역되는 ‘라촌’(12절)으로 응답하신다. 게다가 인자하심, 자비, 긍휼히 여기심으로 쓰이는 ‘헤쎄드’(7절)는 주님의 응답을 표현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자비로우신 주님’이라는 개념은 시편에서 여기 처음 사용되고 있다.

자비로우신 주님은 우리를 우수수 날아드는 화살로부터 막아주시고 덮어주시며(싸카크) 심지어는 둘러싸서 호위(아타르)하여 주는 무적의 방패이시다. 입만 열면 경제 번영이요 숭미주의 팍스아메리카나, 막강한 군사력 증강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안보 구호 따위가 우리의 방패가 아님은 물론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듯 방패는 사람을 죽이는 화살보다 강하다. 신의 방패를 가진 자는 누구인가. 인도의 지혜서엔 이를 3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혈육 핏줄에 기대여 살지 않는 사람(디라 dhira)은 훌륭하며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물리친 사람(산야시 sannyasi)도 위대하지만 신에게 영육간 모든 것을 내맡긴 전사(박따 bhakta)가 되라고 당부한다.

"칼과 화살로 집행한 법은 행동을 통제할 수 있지만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방패)는 법과 총탄과 폭탄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그 일이란 악인과 원수에게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레그 보이드, ‘십자가와 칼’에서)

지상에 앉아 깜박깜박 놀라는 새들은 새가슴이라고 놀림을 받지만 하늘을 박차고 오를 때부턴 어떤 두려움도 놀람도 갖지 않는다. 쌩하고 생애가 흘러 어느덧 노을빛이 번지는 시절. 새처럼 창공을 우러르며 영원을 품어낼 시간이 되었다. 당신 인생에 오로지 영멸을 막아줄 방패는 주님 한분뿐. 미혹의 화살에서 건져줄 방패는 주님 한분뿐...

사막의 수도승 마카리오의 말마따나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다 당하는 모욕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가난을 부요함으로 알고, 굶주림을 축제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할 시간. 주님께 모든 것을 내맡긴 전사는 검과 활이 없어도 방패하나면 끄덕없다. 사랑의 방패를 들면 천하무적 승리뿐. 영원히 아름다운 청춘인 당신이여! 아이의 돋아나는 이빨처럼 그 부드럽고 생기 넘치는 사랑과 평화로 새롭게 되라. 죽음의 그림자, 악인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홧홧 달아오르고 말리라.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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