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저희 본당 신부님의 강론이 마치 저희 두 사람에게 호소하듯 간절합니다."
명문대 출신 신혼부부가 1994년 구정에 세배 와서 한 말이다. 참으로 흐뭇한 증언이다.

불행히도 많은 지성인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이들의 강론 평 네 편을 옮겨 적겠다.

이미 십여 년 전에 C 시인이 쓴 글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옛말을 인용해서 가정의 화목을 강조하던 끝에, 제 가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어디 직장의 말단 직책이나 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말단 직무를 맡고 있는 신자가 듣는다면 참으로 섭섭할 말씀까지 뱉어내실 만큼 그렇게 격렬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울기 시작했을 때 ‘우는 아이 데리고 나가시오!’ 하는 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 웬지 마음 조리던 기억입니다. 모두들 숙연히 경청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압도이지 불행하게도 경건은 아니었습니다. ······· 바람직하지 못한 신부님의 강론으로 하여, 좀 속된 말로 긴 시간 빼앗기면서 돈 바치고, 혼나고, 현실 생활의 번추(煩醜)만을 재확인하고 돌아오는 것 같은, 그런 미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이태 전에 들은 B 소설가의 강론 평은 훨씬 더 매섭다.

“절실히 사색하고 고뇌하는 가운데서 진솔한 글이 나옵니다. 신부님들께서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절실한 강론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거야말로 참이라는 확신에 찬 강론이 나올 것입니다. 도통 준비하지 않고 금방 일어나서 눈꼽 닦고 나와서 하나마나한 말이나 하면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사는 방식이 별난 탓인가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둡습니다.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어쩌다 상담할 일이 있어서 찾아뵈면 제 말을 듣지는 않고 한사코 골프 이야기만 하시는 겁니다. 없는 사람 형편을 몰라요. 기가 막혀 사제관을 곁눈질해 보면 부인이 없는 것 말고는 다 있습니다.”

K 시인은 주일 강론의 부실을 이렇게 개탄했다.

“연만한 본당 신부님의 강론은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런 대로 괜찮은 강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좌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어 보면 준비를 하기는 했는데 책에서 베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불행히도 보좌 신부님들의 독서 폭이 매우 좁습니다. 주로 동화책, 우화책, 쉽고 재미나는 인기 서적들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럼 신부님들께 느낌을 말씀드리고 개선책을 건의 하시지요 했더니 대답이 서글프다. “성직자들이 평신도의 말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진언했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처럼 나이깨나 든 사람이 무슨 창피입니까? 모난 일은 안 하는 게 상책이지요.”

K 부인이 어느 외국인 성직자의 특강을 청강하고 와서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특강 주제는 ‘부부생활’이었는데 강사는 쉴 새 없이 킥킥거리면서 부부간의 일을 파헤쳤습니다. 문구멍으로 남의 부부 일을 훔쳐보면서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독신인 성직자가 이런 주제를 다루어야 합니까? 꼭 다루어야만 한다면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고백성사 때 받은 보속이 그 특강을 청강하라는 것이었기에 끝까지 참고 견뎠습니다만, 제 사생활이 침범당하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습니다.”

나는 한 세대 동안 강의, 강연, 강론을 한답시고 말 많은 세상에서 어지간히 많은 말을 지껄였다. 내가 잘못했을 때 고맙게도 충고를 하는 분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말을 걸어오는 분들 절대 다수는 찬양 일변도여서 정말 잘한 줄로 착각하면서 살았다. 개신교 성직자 경우에는 자기 부인이라도 직언을 해 줄 수 있겠으나, 가톨릭 성직자 경우에는 뒤에서 쑥덕거리기는 할지언정 일부러 찾아와서 직언하는 교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사실 직언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애덕 행위일 수 있는데 말이다. 가슴에 파고드는 말을 간결하게 하라고 충고하시는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신 게 여간 큰 복락이 아니다.

내 이야기는 덜 하고 주로 예수 이야기와 교우들 이야기를 하도록 힘쓰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아울러 나름대로 강론 개선책을 궁리해 본다.

우선 사도 바울로의 명언을 명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를 위한 여러분의 종들로 선포합니다”(2코린 4,5). 강론의 근본 주제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직접적으로, 명시적으로 예수를 거론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와 현실이라는 주제로, 또는 인물과 사건이라는 주제로 예수를 간접적으로, 함축적으로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릇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복음이요, 이룩하신 일은 구원이라, 참된 강론이라면 고통과 번뇌로 지친 청중에게 복음 따라 기쁘게, 구원 따라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지나치게 죄의식을 조장하여 신앙생활이 짓눌리는 삶이 될세라 조심해야겠다(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분도출판사, 1977, 39~45쪽).

둘째, 강론 초고를 준비한 다음 지각 있는 교우들의 평을 들어 보완한다. 독일 괴팅겐 천주교회 본당 신부의 강론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있어 그 까닭을 알아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분은 주중에 강론 초고를 준비한 다음에 지각 있는 교우 몇 분을 불러 평을 듣고 나서 강론한다는 것이다. 교우들의 말을 교우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먹혀드는 강론이 될 밖에. 내 나름으로 이런 시도를 더러 했으나, 교우들이 비평을 삼가니 실행하기 쉽지는 않다.

셋째, 한 가지 주제를 제법 다룰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겠다. 한 시간 안에 주일 미사를 끝내고자 쫓기듯 해치워서는 안 되겠다는 뜻이다. 주일미사가 시간마다 연속되는 까닭에 부득이 강론 시간을 줄여야 한다면, 차라리 주일 헌금을 미사 전 또는 미사 후에 성당 입구에서 받도록 할 일이다. 이미 1960년대에 왜관본당에서 실시하여 좋은 결과를 거둔 전례가 있다. 헌금 수입이 줄세라 걱정할 것도 없다. 교우들을 설득시키기 나름이겠다.

넷째, 매주 교구 주보에 실리는 강론도 매우 중요하다. <서울주보>를 보면 노상 보좌신부들이 돌아가면서 강론을 집필하는데, 그 내용과 표현에 미숙한 점이 적지 않다. 눈썰미 매섭고 글 솜씨 미끈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거나 적어도 함께 검토하면 지금보다 훨씬 알찬 강론이 실릴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개개 성당의 부실한 주일 강론을 크게 보완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강론이 대체로 부실한 형편이나, 그래도 강론 준비에 정성을 쏟아 먹혀 들어가게끔 강론하는 신부가 있다니 어둠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이다. 내 귀로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글을 읽고 저으기 감명을 받았다. 황창건 지음, <인생특강>(성바오로출판사, 1994)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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