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광주대건신학대, 서강대, 성공회 등에서 성서학 교수직을 역임하시다 은퇴하고, 지금은 다석학회를 통해 다석 유영모에 대한 연구를하고 있으며, 그 길을 돌아 다시 예수에게로 갈 준비를 하고 계신 정양모 신부님. 그분께서 그동안 이런저런 잡지에 두루 기고하셨던 글 가운데 다시 읽을 만한 글을 골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합니다. -편집자

어떤 이는 우표를 수집하고 어떤 이는 양초를 수집한다. 또 어떤 이는 찻숟갈을 수집하고 어떤 이는 성냥곽을 수집한다. 요즘 나는 사세구도 모으고 기도문도 모은다. 그렇지만 어떤 기도문이나 막 모으지는 않는다. 되도록 진선미 삼박자를 다 갖춘 기도문, 내용과 구조와 표현이 다 좋은 기도문만 골라 모은다. 그러자니 기도문 수집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인생에 맑은 날보다 궂은 날이 더 많듯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내용과 구조와 표현이 다 좋은 기도문이 흔할 리 있겠는가. 나는 다음의 몇가지 기도문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바친다.

게쎄마니 기도

아빠, 아빠께서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사오니,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마르 14, 36)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예루살렘 시내 어느 이층방에서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드신 다음, 키드론 골짜기를 지나, 올리브 산 아래 자리잡은 게쎄마니 숲에 이르러 바치신 청도이다. 곧 체포되어 처형될 것을 예감하시면서 드리신 비감한 간구이다.

그분의 춘추 대략 36세, 요절을 마다시는 예수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갈원이다. 예수 역시 별수없군? 아니지. 청원기도의 후반부를 보라.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예수 자신의 뜻과 하느님 아빠의 뜻이 상충할 때면 자신의 뜻은 뒤로 물리고 아빠의 뜻을 앞세우겠다는, 자기 소원 유보야말로 흔히 청도에 깃들기 쉬운 기복 독소를 말끔히 치우는 해독제이다. 모름지기 게쎄마니 기도는 모든 청도의 귀감이다. 게쎄마니 기도를 흉내내는 청도는 하나같이 참되다.

홍성유 선생이 아내의 임종을 앞두고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바치신 청도가 그렇다. 영세도 하기 전에 이런 기도를 바치다니 그저 은혜롭다.

“이제까지 가져보지 못한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다영 엄마에게 구원을 주십시오.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평온한 최후를 맞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옵소서. 아내 없이 홀로 사는 고통은 이제까지 지은 죄값으로 감내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영이의 뒤를 돌봐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이 아빠에게 좌절없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생활성서> 1991년 1월호, 38쪽).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

힘 자라는 데까지
임께서 주신 힘 자라는 데까지
임을 두고 나는 물었습니다.

믿는 바를 이치로 알고 싶어서
따지고 따지느라 애썼습니다.

임이여 내 하느님이여
내게는 둘도 없는 희망이여
내 간청을 들으소서.

임을 두고 묻기에 지치지 말게끔
임의 모습 찾기에 늘 불타게끔

임이여 물을 힘을 주소서.

임을 알아뵙게 하신 임이옵기에
갈수록 더욱 알아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신 임이옵기에.

임 앞에 내 강함이 있사오니
임 앞에 내 약함이 있사오니

강함은 붇돋아주소서
약함을 거들어주소서.

임 앞에 내 앎이 있사오니
임 앞에 내 모름이 있사오니

임께서 열어주신 곳에
내가 들어가거든 맞아주소서
임께서 닫아 거신 곳에
내가 두드리거든 열어주소서.

임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소원을 내 안에 키우소서
임께서 나를 고쳐놓으실 때까지
고쳐서 완성하실 때까지.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15월 51항. 정한교 옮김, 정양모 감수).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됨을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는 까닭입니다.

(작자미상, 정양모 역)

이태리 중부 산동네에서 살다 간 해맑은 성인 프란치스코(1181-1226) 말고 그 어느 누가 이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기도문을 지을 수 있을소냐 하는 생각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작품이란 전설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실은 100여 년 전 어느 무명 프랑스인이 만든 기도문이다.

평화의 기도는 전후 양편으로 짜여있는데 그 논리가 정연하다. 전편은 역가치들이 있는 곳에 가치들을 이룩하도록 해주십사는 청도요, 후편은 가치들을 내가 누리기보다는 남들에게 베풀도록 해주십사는 청도이다. 이 기도문의 유래와 내용을 좀더 알고 싶은 독자는 <생활성서> 1989년 3월호 30-32쪽을 보라.


예지를 비는 기도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아울러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휘시엥 뒤발, <달과 놀던 아이>, 성바오로출판사 1990년, 76쪽에서 옮겨쓴 기도문이다. 프랑스 예수회원 뒤발 신부(1918-1984)는 가수로서 구라파에서 수십 년간 명성을 떨친 분이다. 너무나 예민하고 다정다감하신 분이라, 예수회 공동체 생활에서, 그리고 공연활동에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한 잔 두 잔 술로 마음을 달래다가 부지불식간에 그만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뒤발 신부는 술을 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언젠가 생전 처음으로 단주 모임에 참석해서,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참석자들 모두가 위의 기도문을 바치는 것을 보고 느낀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

“단주 회원들과 그들의 기도는 나의 3년간의 철학과 다년간에 걸친 궤변을 빙그레 웃으며 손목에 힘 하나 쓰지 않고서 빗자루로 쓸 듯이 싹 쓸어버렸다.…… 신자들이 저렇게 안이하게, 무심하게 기도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거니와 비신자들이 또 저렇게 자유스런 태도로 조용히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본 일도 없다. 지금, 자유라는 낱말이 여러분에게 어떤 뜻으로 들리는가? 기도를 드린 다음 모두 일어났다. 커피와 과일쥬스가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대하는 새로운 친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쉴새없이 되풀이했다.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책, 76쪽).


뉴만 추기경의 기도

주 예수님,
세례를 받은 이래
주님과 하나임을 믿는 기쁨과 책임을
누려왔사오니
제 안에 있는, 당신 현존의 등불을 끄지 마소서.
주님, 저의 눈으로 보시고,
저의 귀로 들으시고,
저의 입술로 말씀하시고,
저의 발로 걸으소서.
주님,
보잘것없는 이 몸이오나
가이없는 당신 현존을 가리키는
미약한 상징이나마 되게 하소서.
사람들이 저를 눈여겨 보면 볼수록
오호라 그것은 아직도 탁하고 흐리다는
증거입니다.

존 헨리 뉴만(1801-1890)은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나 이른바 옥스퍼드 운동을 거쳐 1845년 천주교로 개종했다. 19세기 영국 최고 지성인이었음에도 그는 생시에 천주교회에서 제대로 예우를 받지 못했다. 1879년 레오 13세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을 제외하면 그는 홀대를 받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가 교부들을 깊이 연구하여 교리의 발전과정을 밝힌 업적은 요즘 날이 갈수록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여기 소개한 뉴만 추기경의 기도문은 그 끝부분이 다소 난해하다.

사람들이 추기경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면 참 좋겠는데, 자꾸만 추기경 인물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니 한심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맑게 반영하는 인물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상의 기도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 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보이게 하소서.

(구 상,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89년 95쪽.)

루가는 예수의 임종기도 두 편,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임종기도 두 편을 짝지어 엮었다.

예수의 임종기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루가 23, 34).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 46 = 시편 31, 6).

스테파노의 임종기도

“주님, 저들에게 이 (살인)죄를 씌우지 마소서” (사도 7, 60)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으소서” (사도 7, 59)

구상 선생은 예수께서 바치신 첫째 임종기도 (루가 23, 34)를 본떠서 위의 기도문을 만들었다.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보이게 하소서”라는 시상이 절묘하다. 강아지를 길러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떠오를 수 없는, 참 정겨운 시상이다.

최종태의 기도

될 수만 있다면 저를 떨어뜨리지 마시고
저기 남아 있는 모과들처럼 매달려 있게
하여주소서.
어느 가을날 노오랗게 익거든
그런 날에 당신의 품으로 저를
거두어주소서.

(최종태, <형태를 찾아서>, 열화당 1990년, 22쪽.)

이런 기도문을 만들게 된 사연을 <도끼 얼굴>의 조각가 최종태 교수님에게서 직접 들어보자.

“우리집 마당에는 모과나무가 한 그루 있다. 금년에는 모과가 너무 많이 열려서 걱정을 많이 하였다. 봄날 소독하는 사람들이 왔는데 떠들어대는 말인즉 ‘왔다, 맘대로 열려뻔졌네’ 하는 것이었다. 그 남도 사투리가 어찌나 절묘한 표현이었던지 가끔씩 생각이 난다.

저걸 다 놔두면 나무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고 똑같은 놈들이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솎아주나 매일같이 걱정이었다. 한데 날이 가면서 하나씩 두 개씩 떨어지도니 이제는 있을 만큼만 있고 말하자면 저희들끼리 다 솎아내서 이쁘게 커가고 있다. 자연의 섭리란 참 묘하구나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섭리라는 것이 참으로 겁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모과나무 밑을 지날 때마다 나는 기도한다“ (위의 기도문)(위의 책 22쪽).



김형영의 통회시편 5

나 혼자 지은 죄
나 혼자 가슴에 품으려 하였더니
봄날의 축대처럼
당신 앞에 무너져내려
우르르 우르르 무너져내려
이 몸 고개 들지 못하고
마흔 날 마흔 밤을 엎드리오니
주님이시여, 내 죄 더는 묻지 마소서.
당신께서 내 죄 헤아라신다면
살아도 살지 못하고
죽어도 죽지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여주소서
당신을 한 처음 말씀이오니
이 몸 새롭게 하여주소서

(김형영, <다른 하늘이 열릴 때>, 문학과 지성사 1987년, 74쪽.)

김형영 시인은 1980년 입교하기 전후해서 10여 년간이나 앓던 중병을 용하게 이기고 이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척 선하고 조용한 모습을 지닌 시인에게 그 무슨 뉘우칠 일이 쌓였으리오마는 시인은 줄줄이 통회시편을 엮고 있다. 그 중 여기 실린 다섯째 통회시편은 구약시편 제 51편을 원용한 것이다. 하루빨리 죄의식을 극복하고 복음 따라 기쁘게, 구원 따라 홀가분하게 사십사 하는 뜻으로 마르틴 부버의 글귀를 덧붙인다 :

“참회한답시고 애만 태우는 사람, 자신의 속죄행위가 모자란다고 번민하는 사람은, 돌아섬이라는 일에 써야 할 요긴한 힘을 움켜쥐고만 있는 셈이다. 속죄의 날 강론에서 게르의 랍비는 이런 자학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에 대한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저열한 그것을 마음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이 가 있는 거기에 자신도 갇혀 있고 사람 영혼이란 생각하는 그것에 온통 잠겨 있게 마련이므로, 그런 자는 저열한 것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은 점점 거칠어지고 마음은 점점 완고해지며 더구나 우울에 억눌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 어쩌자는 말입니까. 똥을 이리 쓸고 저리 쓸어본들 똥은 똥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 해봐야 하늘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끙끙거릴 겨를이 있으면 차라리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진주알을 꿰고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성서에서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십시오’” (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장 익 옮김, 분도출판사 1977년, 41-42쪽).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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