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 교수의 <믿는다는 것> -5

믿음, 있거나 없거나

믿음에 크고 작음, 강함과 약함이 있을까? 믿음이 2%의 의심이 극복되고 의심하던 내용이 사라진 상태라면, 믿음은 크기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본래 주어진 바탕 위에서 너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면, 믿음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된다.

믿음이나 깨달음이 양적인 문제라면, 조금씩 버리거나 조금씩 채우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나 깨달음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이다. 성경에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그런데 예수는 다소 뜻밖의 대답을 한다: “여러분께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루가 17,5-6)

▲ 이찬수 교수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선생님처럼 병을 고쳐 주고 싶은데 왜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느냐며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자, 예수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마태 17,20) 중요한 것은 믿음은 산을 옮길 정도로 확실한 내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산마저도 옮길 만한 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것, 그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믿음이 조금씩 더해질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뜻이다.

믿음이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 믿음이 약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다. 믿음이 많아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믿는 자는 못 할 일이 없다”(마르 9,23)고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는 “믿음은 아무리해도 움직이지 않는 히말라야와 같다. 어떠한 비바람도 히말라야를 움직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믿음은 그 대상 혹은 내용과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가령 어떤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믿음 속에서 그 일은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여전히 의심하고 불안한 이유는 그 대상이 나와 분리되어 있고, 나와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간혹 불안을 감추려고 억지로 ‘믿는다’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믿는다면 새삼스럽게 믿음이라는 말을 쓸 이유도 없다. 이미 나와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 속에 이미 모든 일이 들어 있다. 이것은 깨달음이 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질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 ‘대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한번 깨닫는 그 순간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조금 깨달아서 조금 부처가 되는 식이 아니다. 대번에 깨쳐서 대번에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頓悟)인 것이다. 

믿음, 기대이고 희망이다

전술했듯이, 믿음은 지금까지의 정황에 비추어보건대 이대로 가면 목적에 도달하다는 긍정적 기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긍정적 기대라는 말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사실에 대한 믿음은 그 사실이 어떻게 변해 갈지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도 관련되어 있다. 기대한다는 것은 희망을 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믿음은 그 대상이 지시하는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희망적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칸트도 종교를 이런 차원에서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성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성이 기울이는 관심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그러면서 (1)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형이상학(철학), (2)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도덕, (3)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종교라고 정의했다.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즉, ‘희망’을 종교의 영역에서 찾은 것은 의미있는 통찰이다. 안다는 것, 실천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쉽게 얻어질 수도 있지만, 희망한다는 것은 끝없는 바람이고 과제이다. 희망은 말 그대로 희망이지 현실이 아니다. 우리의 바람인 한, 어떤 점에서는 우리의 현실 경험과 어긋날 수도 있다.

하지만 희망을 가지면 그 희망을 이루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희망은 더 이상 미래에만 머물지 않는다. 희망하는 것은 우리의 삶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그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가지는 순간 삶 안에 들어와 삶을 움직인다. 희망은 미래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주어져 있으면서 현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희망을 품고 있으면 그 희망대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그저 미래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재화시킨 예수야말로 희망의 역설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몰트만(Jurgen Moltmann)은 ‘희망’을 중시하는 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는 것은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그에게 하느님은 희망의 하느님인 까닭에, 현실의 인간은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역동성에 개방적일 수 밖에 없으며, 하느님은 그러한 개방과 희망의 근거이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을 통해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희망은 단순히 현실 도피가 아니다. 아픔과 죄와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삶의 한계를 피하지 않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데에 희망의 힘이 있다.

몰트만에 따르면 희망은 신앙과 동의어이다. 반대로 절망이 불신앙이요, 죄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나 사실을 믿는다는 말은 그 일이나 사실의 의미와 전망 등에 대해 희망을 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곧 희망의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

이찬수 (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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