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 교수의 <믿는다는 것> -4

온전히 믿어지기까지 아직은 부족한 2%를 채우는 '용기'

믿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믿음이 어느 순간 주어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주어지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의지이다. 의지는 어떤 일을 이루려는 마음이다. 의지에는 언제나 목표가 있게 마련이다. 그 목표를 이루려 노력한다는 말은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목표에 이르려면 거기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떤 사실이나 가치를 받아들이려는 의지와 그렇게 받아들여진 상태는 다르다. 의지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믿으려 시도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다. 믿으려는 ‘의지’와 실질적 ‘믿음’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단순히 ‘그래 믿을게’ 한다고 해서 그 간격이 대번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일종의 용감한 결단이다. 전술한대로 믿음은 어떤 사람, 사실, 가치, 세계관이 어지간히 이해되고 공감되고 와 닿으면서도 무언가 2%가 부족할 때, 그때 기존의 경험에 근거해 그 방향에 스스로를 내어 맡길 때 형성된다. 꼭 이루어야 할 어떤 일을 어떤 친구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 친구가 그 일을 온전히 해낼 수 있을지 ‘2%’의 불확실성이 있을 때, ‘그래도 잘 될 거야’ 라며 용기 있게 인정하는 자세가 믿음이다.

이렇게 용기는, 비록 아직 가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에 비추어 보건대 이 길로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깊은 내면의 소리에 부응하는 행위이다. 지금까지 충분하니 그대로 가면 된다는 내면의 소리에 충실한 행위가 용기이다. 온전히 믿어지기까지 아직은 부족한 2%를 그 용기가 채워 준다. 그 순간 믿음의 내용이 단순히 내 밖의 어떤 대상으로 남지 않고 내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럴 때 수동적 ‘믿어짐’이 능동적 ‘믿음’이 되는 것이다.

믿게 된 대상과의 간격을 메우는 힘이 용기이다. 그래서 믿음이 온전해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의지가 믿음 자체가 아니듯이, 용기는 믿음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의지가 그렇듯이 용기 역시 믿음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신앙을 용기와 모험의 상호 작용으로 파악했던 것도 이와 같다:

신앙과 용기는 동일하지 않다. 신앙은 용기 외에 다른 요소를 가졌고, 용기는 신앙을 긍정하는 것 이상의 다른 기능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모험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신앙의 역학에 속한다.

믿음은 하늘에서 저절로 뚝 떨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믿는 이의 마음이 다양한 현상을 경험하며 충분히 움직였으되, 마지막 한 가닥의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요청되는 모험적 용기를 포함한다. “그래, 가보는 거야!” 하며 결단할 때 정말 그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가려고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 어떤 사람이나 사실이나 가치에 대해 잘 생각해보고 용감하게 수용할 때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용기와 모험을 동반하는 대단히 역동적인 행위이다. 

불교적 믿음

보조국사 지눌의 글에는 이런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장부의 용기를 내라.” 무엇을 향한 용기일까? 바로 내가 평생 추구해 온 진리가 그렇게 추구하는 나의 마음 안에 온전히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이런저런 근심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지금의 마음 상태 그대로 이미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인정하라는 것이다. 무언가 부족하고 아쉽고 때로는 괴롭기까지 한데 그 괴로워하는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똑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느닷없이 이런 사실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싶고 찾고 싶은 것이 내 마음 안에 고스란히 갖추어져 있다니, 내 마음이 그대로 진리라니, 쉽게 이해되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무슨 뜻인지 이해해 가는 공부(工夫)가 필요하다. 공부에는 참선을 통해 나는 누구인지 온 몸으로 성찰하는 과정, 성현들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의미를 따져 보고 이해해 가는 과정이 포함된다.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리는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내가 추구하던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온전히 찾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 중 마지막 2%가 불확실할 때, 지금까지 공부하고 수행해 온 그 힘과 방향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용기가 공부의 완성이다. 그 용기 덕분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든든한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지눌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마음속을 비추어 보고 뜻을 얻은 후에 믿음의 뿌리를 견고히 하고 용맹스런 마음을 내어 계속 보호해 가진다면 무엇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믿음에는 일종의 결단이 들어 있다. 그 결단은 그렇게 결단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잘 생각해보고 정직하게 결단하면 그 결단한 내용이 자신의 것이 된다. 지금 당장은 무언가 불확실해도 이 결단의 용기로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확실히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2%의 부족함이 단박에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채우는 힘이 믿음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로 온갖 선법을 길러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믿음도 기독교에서의 믿음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의심의 다이내믹스

믿음은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 그 2%의 공백이 채워지면서 완성된다. ‘2%’라는 은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가 의지 혹은 용기라면, 다른 하나는 의심이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무언가 알 것 같기는 한데 채워지지 않는 2%는 의심으로 나타난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해도 될까, 그게 아닐지 몰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실수하는 거 아닐까 등등 멈칫하며 딱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의심이다.

가깝게 지낸다고 해서 그 친구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나를 낳아 준 부모는 물론 형제자매라도 그 속생각을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이렇다 저렇다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다 알지 못하는 부분이 의심으로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의심은 믿음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의심(疑心)을 거치지 않고 신심(信心)에 이르는 길은 없다. 믿음의 반대말을 의심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의심은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자 믿음의 일부이다. 의심스런 부분에 대한 오해가 풀리면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

‘대의현전’(大疑現前)이라는 말이 있다. ‘큰 의심이 내 앞에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진리를 깨닫기 전에 큰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의심이 남아 있다면 완전히 깨달은 상태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은 단순히 깨달음의 방해 요소가 아니다. 온전히 깨달으려면, 온전한 믿음에 이르려면, 의심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2%가 채워져야 믿음이 된다고 할 때 그 2%는 의심이다. 의심의 단계를 거쳐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의심을 억누르면서 제대로 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종교에서 의심을 죄악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좋은 태도는 아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아이들에게 의문 없는 신앙이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통해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자살 테러범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것은 정당하다. 의심 없이 믿으라고만 하지 말고, 건강하게 묻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건강하게 묻고 생각하다보면 의심이 해소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럴 때도 또 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그래, 한 번 가 보자’ 하며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 때 지금까지 성찰해오던 내용을 용기있게 수용하면서 의심이 신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의심은 지금까지의 경험에 근거해 용기있게 결정하면서 극복된다. 용감한 결정으로 의심이 극복되고 결단한 내용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용기’라는 말을 자칫하면 오해할 수 있다. 용기 있는 결단이라 하지만, 그때의 용기가 ‘막무가내식’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용기도 지성, 이해, 공감, 기대 등이 녹아든 건전한 98%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용기이다. 여기서 98%라는 숫자는, 앞에서도 사용했지만, 단순히 양적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기초를 나타내는 숫자적 은유이다. 어지간히 이해되고 대부분 알겠는데, 무언가가 부족해 최종적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지금까지의 내적 경험에 비추어 그 경험을 믿고 경험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결정하는 자세가 용기이다. 그렇게 용기 있게 결정할 때, 의심하던 내용이 믿음으로 바뀐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이다.

이찬수 (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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