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 교수의 <믿는다는 것> -1

강남대 이찬수 교수가 최근에 <믿는다는 것>(너머학교, 2011)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저 '믿으라'는 말로는 다 해명될 수 없는 종교, 신심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돕는 것입니다. 이 책은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믿음 자체를 쉽게 분석한 책으로는 처음 나온 책이니다. 맹목적 신앙을 버리고 깨달음의  신앙으로 가는 첫걸음을 배우고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이찬수 교수가 이 책의 핵심을 요약해 15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 <믿는다는 것>, 이찬수 글 노석미 그림, 너머학교, 2011
‘믿음’ 하면 ‘종교’를 연상하곤 하지만, ‘믿음’은 인간 관계의 기본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 만한 불행과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을, 내가 너를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대번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믿음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믿으려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바로 믿게 되지 않는다. 결국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믿어지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행위인데 ‘믿으라’는 요청을 하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아 공허하다.

믿는다는 것은 설령 지금은 온전히 알 수 없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다 알지 못할 부분을 긍정적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은 어떤 사실이나 가치가 긍정적으로 전개되리라 예측하면서 그 예측에 몸과 마음을 용감하게 맡기는 자세이자, 그렇게 맡긴 상태이다. 몸과 마음을 맡기는 자세가 믿음이고, 그렇게 맡긴 상태 역시 믿음이다. 그러한 맡김을 통해 비유하자면 ‘2%’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나의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을 맡기는 행동은 저절로 되는 것인가? 어떻게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것일까? 믿음이 믿음의 대상과 주체를 연결해 주는 어떤 자세나 행위라고 할 때, 그 연결성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이 글에서 하나씩 풀어 나갈 주제들이다. 먼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왜 사라지는지, 믿음의 주체와 대상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왜 믿음이 왜곡되어 독선으로 가곤 하는지, 믿음, 신앙, 신념, 신뢰 등은 어떻게 다른지 등등을 중심으로 종교적 ‘믿음’의 문제에 대해 가능한 일상적인 언어로 정리하고자 한다. 

믿음,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믿는다’는 말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경험을 통해 믿을 만한 관계가 형성된 사람에게나 “믿는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믿음은 내가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방과의 관계가 만들어 낸 것이다. 길든 짧든, 단순하든 복잡하든, 과정이 생략된 믿음은 없다. 아무런 관계도 없던 이에게서 믿음이 대번에 생겨나지 않는다. 믿음이 이루어지려면 믿음의 대상이 이해되고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물론 사실이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적어도 그이와 대화하고 공감하고 여러 가지를 공유하면서 생겨난다. 믿음은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관계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들어 있다. 대상에 대한 앎과 지식, 이해와 공감, 동의와 수긍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알지 못하고서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믿음이 생기려면 지식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다. 앎이 없는 믿음이란 불가능하다. 친구를 잘 알아야 친구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찬수 교수는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믿으려만 든다면 그때의 믿음은 허위이거나 맹목이 된다"고 지적했다.

유럽 중세의 사상가 안셀무스는 이해하려면 믿어야 하고, 믿음에는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신앙 없는 이성은 교만이 되고, 이성 없는 신앙은 맹목이 된다. 믿음과 이해 혹은 신앙과 이성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신앙과 믿음이 같은 말만은 아니지만, 어떻든 신앙에 건전한 이해가 빠지면 맹목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동반할 때 건전하고 온전해진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교리적 신념만을 기준으로 남을 배척하는 경우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한 까닭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선사 영명연수(永明延壽)는 이렇게 말했다: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무명(無明)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삿된 견해를 더욱 자라게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진리의 세계도 이해는 못한 채 무조건 믿으려만 든다면 그때의 믿음은 허위이거나 맹목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 안다는 것은 성찰과 공감의 과정이자 결과이다. 그런 이해와 앎에 기반을 둔 믿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믿음과 앎을 겸해야 도(道)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을 때도 같은 뜻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길거리 전도자들도 많지만, 그런 식으로 요청한다고 믿음이 순식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에 대해 알아야 하고, 예수를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벌어진 사실에 대해 공감해야 한다. 정말 그런지 따져 보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상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 마음 상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사람, 믿을 수 있을 사람이 믿게 된다. 지식, 이해, 공감 등 기존 삶의 경험에 근거해서 믿음도 생겨나는 것이다.

당연히 억지로 작정한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믿음의 내용이나 대상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다면, “그래 알았어, 믿을게” 말한다고 해도 실제로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 좋다, 사후 영생까지 보증해 준다니 믿겠다’고 결정한다 해도, 내면이 믿음의 상태로 대번에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 삶의 자세를 바꾸어 보겠다는 일시적 결심은 되겠지만, 실제로 믿음의 내용이나 대상과 하나가 되는 단계로까지 바로 들어가게 되지는 않는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서 믿음을 강요한다면, 그 순간에는 ‘믿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단박에 속내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 마당에 ‘믿으라’는 일방적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이찬수(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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