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체제의 한국천주교회와 친일문제 3

최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천주교 인사의 명단 발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논의를 활성화하고, 이 기회에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그림자적 측면을 나누고 미래적 전망을 얻기 위한 자료 제공의 차원에서 세 차례에 걸쳐 기획글을 마련하였습니다. -편집자

1. 한국천주교회의 민족주의자들은 어떻게 무너졌나?

2. 간도지역 한국천주교회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3. 전시체제의 한국천주교회와 친일문제

3-1. 반공주의는 왜 친일로 이어지는가?

3-2. 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나섰는가?

3-3. 한국교회는 어떻게 일본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했는가?



1930년대 중반 이후에 한국 천주교회는 제도교회 안에서 더욱 체계화되고 확장되어 간 반면에 교회 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에 더욱 깊숙히 결속하게 된다. 제도교회는 그동안 비교적 사목활동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간도지역의 교회도 교계제도가 성립된 지 근 10년 만에 체제를 정비하여 1936년에는 '천주교 간도전래 40주년 기념 경축대회'가 연길교구의 용정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또한 한인 성직자들이 비교적 많이 배출되고 조선 지역교회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되자 1937년 4월 13일에 전주 방인자치(邦人自治) 교구가 설정되었다. 따라서 첫교구장으로는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임명된 뒤로 줄곧 교구장을 전주교구 안에서 배출하는 관행을 갖게 되었다.

전쟁을 위해 채비를 갖추는 일본제국주의

이러한 교회 내적 성장에도 불구하고(그 원인일지도 모르지만) 교회는 더욱 일본제국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에 독일, 이탈리아와 ‘공산주의에 대적하는’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하고 중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식민지 조선의 민족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일제는 그해 11월에 '방공법'을 공포하고, 1938년 2월에는 '조선 육군 지원병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일제는 1937년 10월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하여 모든 간행물 서두에 이것을 싣도록 강요하였다. 한국교회의 간행물 중에는 <가톨릭조선>이 1938년부터, <경향잡지>는 1940년부터 이 '황국신민의 서사'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서 일제는 1938년에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조직하여 종교단체를 실제적인 전쟁수행에 협조하게 만들었다.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당시 경성교구장이던 원 라리보 주교 대신에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 신부를 연맹의 대표로 참석시켰다. 그 때부터 노기남 신부는 각종 시국회의에 참석하였고 경성교구의 40여 본당을 순회하며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순교정신으로 보국하자!"

이러한 움직임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더욱 극성을 부려서 이 당시 천주교회는 “순교정신으로 보국하자!”라는 기치아래 교회의 온갖 매체를 활용하여 부일책동에 나서게 된다. 이는 反봉건적 현실개혁의지가 낳은 순교정신을 교권층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위해 악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1939년 기해순교 100주년 기념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대식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이 발대식은 (1) 가톨릭신앙 강화하고 (2) 인고 단련하여 보국하자는 목적으로 열린 것이다. 따라서 순교자 현양회의 성명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순교자들이 우리 신앙을 강화시키고 가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것은 자기와 타인의 구원, 그리고 교회의 발전상 크게 유익할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이것은 훌륭한 보국운동이 됨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니 현재 제국에서는 흥아대업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비상시국에 처하여...순교정신으로 일제에 보국하라!

얼마나 기가 막힌 천주교회의 친일행각인가? 참고로 이 당시 순교자현양회에 가담했던 이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노기남 신부, 장면 등이 핵심적 자리에 있었으며, 그 외에 <가톨릭청년>을 맡았던 장발, 정지용 그리고 해방 이후에 한국교회사에 관한 통사를 처음 집필했던 유홍렬 등이 주목을 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조선교회를 이끌어 가던 엘리트 그룹들이다. 더우기 이 현양회에 참여한 학자들로 일본인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사실도 주목해 볼만한 것이다.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임원 명단

중앙위원, 위원장 - 김윤근 신부

위원 - 이기준, 노기남 신부, 조종국, 장면, 박병래, 박대영

간사 - 장발, 정지용, 이동구, 한창우, 유홍렬, 이승욱, 이순석, 최상선, 최일준

자문위원 - 강우모, 이상화, 송세흥 신부, 야마구찌 이하 5명의 일본인 사학자, 교수, 청년회장 등

'국민정신 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 결성

드디어 1939년 5월 14일에는 명동 계성국민학교 강당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이 결성되었으며, 이어서 천주교 교권층은 ‘조선성교회 8교구 연차 주교회의’를 열어 1940년 6월 13일, <오늘의 감목교서>를 발표하여 “여러지방이 동란중에 빠져있고 여러지방이 장해 밑에 눌러있으나 우리는 평화 중에 거룩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라...국가의 선정으로 바른 질서가 유지되는 동시 우리는 그로부터 허다한 은혜를 받게 되니 이 어찌 이 지방에 나리는 천은이 아니랴. 교우된 본분을 충실히 행함은 곧 착한 국민이 되는 유일한 방도임을 잊지말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하였다.

그해 말에 가면 일본제국주의는 종교단체들을 더욱 조직적으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국민총력연맹’으로 이름을 고치고,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작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전쟁물자 조달과 병력 지원에까지 종교단체를 동원하려고 획책하였다.

따라서 천주교 경성교구(現 서울교구)는 1940년 11월 10일에 명동성당에서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새로이 결성하고 황기 2,360년 봉축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연맹은 1941년부터 매월 첫주일을 ‘애국주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연맹의 총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하였다.

매월 첫주일을 ‘애국주일’로

그 이후 1942년 3월에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에서 직접 <대동아전쟁 기구>를 반포하고 이 기도문을 공과(功課)에 넣어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 뿐 아니라 세부적 지침으로서 매일 아침마다 일본 황실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저녁에는 전몰 장병을 위해 기도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밖에 매주 황군의 무운장구를 위한 기도를 하고, 매월 승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내며, 특히 대축일마다 장엄한 시국기원제를 지내도록 지침을 정하였다.

경성(서울)교구는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더욱 실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1인 1전 헌금운동”을 전개하여 병기를 일제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1944년2월 8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보도특별정신대 (報道特別挺身隊)’에 경성교구연맹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교회는 철저하게 친일행각을 벌여 왔다. 특히 1940년대에 이루어진 교회의 부일(扶日) 사목정책은 신사참배 문제로 빚어진 교회와 일본제국주의 세력 간의 갈등을 없애고 다시 정상적인 협조관계로 돌입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아울러 이러한 관계 변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진 데는 일본 당국의 종교정책 변화에도 그 까닭이 있다.

신사참배의 문제에 대한 교회와 일본제국주의와의 갈등은 오래고도 심각한 것이었다. 그동안 교회는 자신의 생존과 세포분열을 위하여 복음적 가치마저 외면한 채 일제에 협조적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교리적’ 문제에 한해서는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더구나 개신교의 경우에는 신사참배 문제가 순교마저 불사하는 격렬한 항거로까지 번지게 되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종교단체를 감시하고 통제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더우기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고 또 수행하는 과정에서 종교단체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일제가 취한 종교정책은 한마디로 ‘분할 타격 및 포섭작전’이다. 즉, 일제에 대하여 불순한 태도를 보이는 성직자들은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해외로 추방시키고, 비교적 일제에 협조적인 성직자들을 제도교회의 상층부로 포섭하는 것이다.

일제의 선교사 교체 작업

먼저 외국인 선교사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태평양전쟁(1942)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를 정당화 시키는 국제적인 선전활동의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조선 봉건왕조 통치하에서 박해를 당한 경험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독일계 베네딕트회 소속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적성국가인 프랑스, 미국계 수도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천주교회를 동원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일제는 특히 경성교구(파리외방전교회 관할)와 평양교구(미국 메리놀선교회 관할)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평양교구의 메리놀회 성직자들은 오세하 주교를 비롯한 35명의 신부와 15명의 수녀가 감금되었고, 일부는 국외로 추방당하였다.

한편 일본제국주의 세력은 경성교구의 경우에도 프랑스인 교구장이었던 원 라리보 주교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일본인 주교를 교구장으로 들어 앉히려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라리보 주교는 비밀리에 명동성당 보좌로 있던 노기남 신부를 로마교황청에 추천하여 주교품에 올린 뒤 즉각 교구장으로 서임하였다(1942년 1월 18일). 이후 노기남 주교는 일제의 압력으로 선교사들이 밀려나 있는 춘천교구와 평양교구장을 겸임하였다.(1983년에 홍용호 신부가 평양교구장으로 착좌)

▲ 노기남 신부 주교 성성식

호교론적 친일, 노기남 주교

사태가 일본의 의도와 다르게 급속하게 진행되자 그들은 상당히 당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기남 주교의 지나온 행적으로 보아 비교적 일본측에 협조적인 성직자였기 때문에 일본정부 당국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박수원, <노기남 대주교> 188-189면 참조) 사실 노기남 주교는 기존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호교론적 관점에 서서 전쟁 기간 동안 줄곧 일제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게 된다.

한편 다른 교구에서도 교구장이 갈리는 진통을 겪어야 하였다. 전주교구는 초대 교구장이었던 김양홍 신부가 물러나고 1942년에 주재용 신부가 교구장이 되었다. 그리고 광주교구에서는 1943년에 교구장이 일본사람인 와끼다(脇田)신부로 바뀌었다.

이러한 일제의 제도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으로 교회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손상을 받고 그 생존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 말기까지 안간힘을 다하여 친일사목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한 때 일제는 전쟁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병기제조를 위하여 명동성당의 종(鐘)을 떼어 가려고 한 적이 있다. 물론 노기남 주교의 로비활동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교회는 그만큼 자신의 생존과 복음을 맞바꾸려 할 만큼 지조가 없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 당시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계 베네딕트회는 연길교구와 함흥교구를 관할하면서 원산에 광대한 토지와 건축물(양조장, 신학교 등)을 소유한 대지주로 성장할 만큼 혜택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200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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