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체제의 한국천주교회와 친일문제 2

최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천주교 인사의 명단 발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논의를 활성화하고, 이 기회에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그림자적 측면을 나누고 미래적 전망을 얻기 위한 자료 제공의 차원에서 세 차례에 걸쳐 기획글을 마련하였습니다. -편집자

1. 한국천주교회의 민족주의자들은 어떻게 무너졌나?

2. 간도지역 한국천주교회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3. 전시체제의 한국천주교회와 친일문제

3-1. 반공주의는 왜 친일로 이어지는가?

3-2.  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나섰는가?

3-3. 한국교회는 어떻게 일본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했는가?

 

 

▲ 남양군도로 가기 전에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징병된 조선학도병

193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일본제국주의가 전시동원체제를 강화해 가는 가운데 취해진 종교정책과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이 당시에 교회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행동하였다. 먼저 신사참배 등 종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쉽게 타협하지 않았으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대응하였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

신사참배 문제는 당시의 교회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일본제국주의는 일본인들과 식민지 민중 모두에게 천황을 중심으로 복속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야만 일본 군부세력의 침략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일본의 군부정권 담당자들은 신도(神道)를 국교(國敎)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신자들의 반발도 컸는데 특히 천주교와 개신교의 반발이 극심했다.

1917년 일본 나가사끼 교구의 천주교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거부하여 정부로 부터 탄압을 받았다. 당시 일본 정부당국은 신사참배를 단순한 ‘애국적 국민의례’라고 해명하였으나, 일본 천주교회에서는 신사참배가 명백히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조선 천주교회 역시 1925년 <교리교수지침서>를 발간하여 신사참배는 이단이므로 금지한다고 선언하였다.(최루수 <천주교요리> 2권 45면 참조)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의 표현일뿐"

그러나 1932년, 일본 천주교회 주교들은 일본 문부대신이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한 답변을 결국 받아들여 겨우 신사참배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로마교황청에서도 1936년 5월 18일자로 천주교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일본주재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에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이라는 통첩을 내리고 신사참배를 권고하였다.(<경향잡지> 1937, 97-101면; 1936, 218면 참조) 그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으려는 일본의 비위를 거슬러 교회가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한국 천주교회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고 더우기 일제와 교회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자 호교적 차원에서 로마교황청의 결정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교회는 왜 교회의 종교적 신념(교리)에 도전하는 신사참배는 수용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은 전적으로 반대하였는가?

▲ 신사참배를 하려고 서있는 조선학생들

호교론적 현실주의

이러한 문제에 답변하는 데 사실 사상적이고, 이론적인 부분을 따져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교회를 현실적으로 보호하고 확장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하는 호교론적 기준에 따라서 입장을 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호교론적 현실주의”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단순하게 표현해 본다면;

(1) 한국 천주교회는 바티칸 교황청의 충실한 종이다.

(2) 교황청은 이탈리아, 독일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

(3) 왜냐하면 첫째, 1929년 이탈리아 파시즘의 우두머리인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맺어 교황청의 영토를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교황청은 이탈리아 왕국을 공인해 주었다. 둘째,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은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4) 1937년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하여 우방이 됨으로써 교황청은 일본과도 우방이 된다.

(5) 신사참배는 교회의 기본교리(우상숭배)에 어긋나지만 일본은 교황청의 우방이므로 교리상의 사소한 충동을 피해야 교회가 보호된다.

"신사참배를 허한다"

이 밖에 신자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 학교에서 실제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신사참배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성이 검토되었다. 결국 오랫동안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일본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천주교 교권층은 교황청의 권고에 따라서 1936년 6월 12일 ‘全鮮 5교구 연례주교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게 된다.

주교회의 결의사항 抄 (全鮮5교구 首腦 署名)

1)개정건

“神社에서 거행되는 式典에는

유단 애국심의 표시를 위하여 참가함을 許함”

2)5교구 공인 정기간행물에 관한 건

(1)경향잡지:조선교회 기관지

(2)가톨릭연구:평양교구 간행

(3)가톨릭소년:연길교구 간행

이후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일본당국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을 극히 삼가 하였다.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천주교회 교권층은 1940년 6월 10일-13일 <조선 성교회 8교구 연차 주교회의 사목교서>에서 교황의 말씀까지 운운하면서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이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도록 자제시켰다.

교황성하는 교서를 이 지방에 응용하여... ‘국민정신 통일’을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는 조선총독부와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도록 하셨습니다. (위 사목교서 참조)

이러한 사실은 개신교회가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수락한 이후에도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현실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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