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새해다. 묵은 매듭을 풀기로 결심한다. 속아지와 뒤끝이 장난이 아닌 못된 성질 때문에 순전히 나 스스로 묶은 매듭들이다. 결자해지라고 했다. 내편에서 일방적으로 묶었으니 정작 피해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중의 하나가 아무개 신부와의 매듭이다.

그날 그 사건은 우리의 30년 우정에 9.11테러나 다름없었다.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졌다. 배신감에 어금니를 악물고 혼자 절교를 선언했다. 다시는 네 얼굴 안본다고.

우리는 같은 동네 같은 골목에서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골목 맨 끝자락의 양철대문집. 그의 집은 숨바꼭질 하다가 숨어들기 좋은 나만의 은신처였다. 술래에게 쫓기는 나를 환영이라도 하듯 그 집 대문은 항상 빼꼼히 열려있었고 맨드라미 붓꽃 백일홍이 흐드러진 꽃밭 속에 몸을 숨기면 어떤 노련한 술래의 레이다 망도 피할수 있었다.

채송화와 토끼풀이 잔뜩 깔린 바닥에 누워 턱까지 차오르는 숨소리를 잠시 고르고, 무성한 감나무 잎사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을 감상하는 여유까지 덤으로 누렸으니 한마디로 그 집은 좁고 어둡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의 두려움에서 나를 구해주는 평화와 안식의 피난처였다.

ⓒ 한상봉 기자

그때의 시골아이들이 늘 그랬듯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학업 때문에 고향을 떠난 후, 그도 그 집도 까맣게 잊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보건소에서 일하던 어느 여름이었다.
“마리아!”
자전거를 타고 보건소에서 나오는데 누가 뒤에서 부른다. 자전거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니 낯선 남자다. “너 마리아 맞지?” “누구?” “나 아무개야!”

칸트였다. 4학년 3반 아이들 가운데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고 성실하고 겸손해서 담임선생님이 ‘철학자 칸트’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던 아무개였다. 그간의 안부를 묻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며 뜻밖의 대답을 한다. “나 신학교 갔어”

성당의 주일학교 여름 산간학교도 마치고 칸트도 신학교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방학동안본당에서 한 수고와 늦깎이 신학생의 앞날을 위해, 격려차 칸트와 주일학교 교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생전처음 요리라는 위험한 모험에 도전했다. 주메뉴는 불고기와 기타등등.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철학자 칸트처럼 비판과 독설과 커피만 먹고 살 것 같은, 밥이라고는 겨우 새 모이알 만큼만 먹는 그가 밥그릇을 두 번이나 비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고봉으로!

아무개 자매가 성당에 등장한 사건은 우리사이에 끼어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녀로 말하자면 결혼한 지 7개월만에 졸지에 남편을 심장마비로 잃고 시댁에 얹혀사는 코스모스처럼 가늘고 가엾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작은 찻집에서 칸트가 주야로 찻집을 쓸고 닦고 씻는 막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드디어 나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제 막 찻집을 나오는 칸트와 그녀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칸트는 익숙하게 가게의 문을 잠그고 손수 무거운 셔터를 내리더니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낌새이지 않은가!

그 광경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칸트가 아니었다. 돌쇠였다! 며칠전 내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저녁상에 후식까지 먹을 때만 해도 설거지는커녕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칸트가 아니었던가! 덕분에 나는 밤늦도록 혼자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느라 얼마나 욕을 봤던가. 충격이었다.

그후 칸트, 아니 돌쇠는 신부가 되었고 본당을 거쳐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의 절교는 여전히 현재진행인 채로.

다시 새해다. 그리고 절교 선언 후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칸트와 돌쇠라는 반쪽만의 진실도 내 옹졸한 마음의 누더기도 벗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새해 첫 편지를 칸트 아니 돌쇠에게 쓴다.

“세상을 멀리 보기 위해 거인의 어깨에 선 너, 거인의 바짓가랑이 밑을 헤매지 말고 거인의 어깨위에서 조잘대는 난장이는 더 더욱 되지 않았으면 바래. 항상 빼꼼히 문을 열어둔 그때의 양철대문 너의 집처럼, 술래에게 쫓기는 그 누군가의 어깨에 서서 세상을 바라봐줘. 그때 찻집의 자매에게 해 줬던 것처럼 공감과 연대의 두 날개로 돌쇠신부가 되어줘. 아참, 늦었지만 신부가 된 걸 축하해!”

심명희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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