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도서관 나들이] <신앙언어>, 서공석,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

“신앙은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살겠다는 사람의 의식과 실천을 총칭하는 단어”라며, 하나의 종교가 지닌 경전과 의례, 공동체의 제도와 법을 총망라하는 ‘신앙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는 책이 서강대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부산교구 은퇴사제인 서공석 신부의 <신앙언어>(2011)다.

현대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신앙언어

서공석 신부는 현대인에게는 다분히 ‘신화적’인 교리체계와 신학을 비판하면서, 현대인에게도 ‘믿을만하고’ ‘납득할만한’ 신앙언어가 해석학의 도움으로 거듭 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서 신부는 “오늘 교회 안에서 신앙언어가 실효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는 전승된 신앙언어가 현대인의 ‘인식의 망’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되지 않고, 과거 중세봉건적 교회의 기반에서 정립된 말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오늘의 신앙언어가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강요하며, 인과응보의 하느님을 가르치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예수는 율법을 매개로 인과응보를 주장하던 유대교 당국에 맞서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고, 입신양명이 아니라 섬김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음을 상기시켰다. 서공석 신부는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손상시키는 교회의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앙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빙자한 종교집단이 행세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교계적 관료주의 교회에서 카리스마적 자율교회로

한편 현대인의 종교적 감수성을 언급하며,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먼저 벗어나 관계지향적 태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서공석 신부는 이원론이 인간 상호간의 차이를 다양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극복할 대상으로 보았던 점을 지적했다. “보이는 것, 곧 물질, 육신, 세상, 자연, 활동, 다양함 등을 보이지 않는 것, 곧 정신, 영혼, 하느님, 초자연, 관상, 불변하는 것 등으로 극복하려는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이원론에서 제국주의, 인종차별, 남녀차별, 계급차별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

서공석 신부는 이러한 태도를 ‘폭력의 문화’라고 지칭하며, “흑인은 백인에 준해서, 어린이는 어른에 준해서, 여자는 남자에 준해서 평가되던 문화”라고 평가하면서, ‘왕이신 그리스도’ ‘부활의 승리’ ‘그리스도의 깃발로 정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다’라는 식으로 그리스도 신앙언어에도 잠입했다고 말한다.

이어 교회의 관료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까지 중세와 반종교개혁적 해석 모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면서, 교권과 다른 견해를 가진 많은 신학자들을 단죄하고, 19세기 근대적 위협 앞에서는 더욱 중앙집권화와 관료화를 통해 스스로 방어하는데 몰두해 왔음을 지적했다. 실상 제1차 바티칸공의회(1870)는 교회의 교계적 관료체계를 교의적 차원으로 올려놓았으며, 현재 교회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교계적이며 관료적인 얼굴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카리스마적이고 자율적인 얼굴이 공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는 중요하다. 공의회의 신학은 역사를 외면했던 사변적 스콜라신학을 넘어 실천을 강조했다. 써뉘(M.D chenu)는 “신앙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각기 다른 신앙표현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사목헌장>에도 반영되고, 해방신학의 출현도 도왔다. 한편 드 뤼박과 이브 콩가르 등이 교부학 등에 담긴 교회전통을 연구해 “법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인 ‘완전한 사회’로서의 교회를 넘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친교로서의 교회 개념을 재발견” 했다. 이는 유럽 중세사회의 수직적이고 일률적인 교회관을 넘어서 다양성 속에서 풍요로운 수평적 교회 공동체관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콩가르의 교회론은 평신도의 중성을 재발견하고, 교황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주교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종교 간의 대화와 그리스도 교회들 간의 일치적 차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해석학적 놀이에 참여하는 신앙언어

▲ 서공석 신부.

한편 서공석 신부는 신앙언어의 해석학적 차원을 강조하며, 교도권 중심의 신학을 비판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사용된 신학교 교과서에서, 교의신학은 3단계로 된 논리였다. 먼저 신앙의 명제를 제시하고, 이 명제가 옳다는 사실을 성서와 교부와 신학자를 인용해 증명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범주로 그 명제의 이론적 추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명제가 항상 교도권이 가르치는 것뿐이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모든 신앙문서들을 취사선택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교도권이 제시한 명제는 불변의 것이며, 반박될 수 없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의회, 신학자들, 주교들이 만든 신앙의 명제들일지라도 계시사건 안에 나타난 하느님 진리의 표현과 일치하지 않으면 모두 참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스콜라신학은 신앙명제의 진위는 오로지 교도권의 권위에 달린 것처럼 가르쳤다. 이를 서 신부는 “결국 교도권의 권위가 성서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교의신학에 균열을 일으켰다.

해석학적 교의신학은 계시된 진리도 역사성을 지닌다고 여겼으며, 해석하는 주체인 인간의 역사성도 진지하게 고려한다. 따라서 “오늘의 교의신학은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지닌 오늘을 위한 의미를 찾는다”고 서공석 신부는 말한다. 여기서 해석학적 신학의 출발점은 불변하는 신앙명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다양한 문서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결과 해석학적 신학은 “과거의 언어를 역사적으로 비평하여 이해하고, 그 이해에 비추어 자신의 삶 속에 해석하여, 미래를 향한 창조적 실현을 모색한다.”

이렇게 보면, 이제 신앙의 진리는 신약성서의 자구(字句)와도 동일하지 않고, 과거 전통의 어느 한 순간의 것과도 동일하지 않다. 서공석 신부는 이를 두고 ‘놀이’에 비유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언어는 예수에게서 비롯된 놀이에서 발생한 것이며, 그 후 역사 안에서 많은 문화권에서 여러 형태의 놀이를 낳았다. 이 예수의 놀이가 하느님에 대한 체험과 더불어 된 것이듯이 우리들의 문화적 상황 안에서 체험된 하느님에 대한 언어도 그 놀이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이 받아내는 수단도 아니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수단도 아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살려서 그것이 주는 제한을 오늘의 세상에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

서공석 신부는 기존 교회의 신앙언어가 실효성을 상실한 이유는 “신앙공동체가 과거의 형이상학적 언어의 단편들을 교리라는 명목으로 반복하면서 참다운 인간 구원의 이야기 혹은 체험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사람들 안에 있는 기복적 욕구에 부합하는 신앙언어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비록 지성인까지도 성사 위주의 기초적인 유치한 신앙 교양에 머물고 만다”고 덧붙였다. 결국 해석학적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신앙 때문에, 신앙인들은 사고하지 않는 집단이 되고, 새로운 해석에서 오는 불안과 결단을 체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언어만을 반복하며 안심하고 평온하게 자기 소원이나 성취되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 서공석 신부는 기존교회가 과거의 교리언어를 그저 반복함으로써 현대인에게 설득력이 없는 '실효성 없는 언어'로 전락했다고 전했다. 

하느님이 없다면 인간은 천재적 동물로 전락

그 결과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조차도 인류 역사 안에서 남용되고 더럽혀지고 폭행을 당해 왔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가 들어있는 표현인데, “그 하느님이 돌보아 주고, 해방하고, 생명을 주는 분임을 믿는다”는 뜻이다. 나머지 종말과 죄, 구원, 교회, 성사 등은 이 하느님과 맺는 연대성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분쟁을 통해 이 ‘그 하느님’이란 말을 더럽혔고, ‘이 하느님을 위해’ 서로 죽이고 죽어갔다.

이를 사실상 ‘신의 부재(不在)’라 부를 수 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조차 “무신론은 현대세계의 지극히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며 시대의 징표”(사목헌장 19항)라고 말하게 했다. 이제 세속화는 대세가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낸다. 인간은 이제 자신을 예속시키던 절대적 초월 앞에, 또 억압적인 교회의 제도 앞에서 인간 스스로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합리성을 추구하며 ‘신이 없는 듯’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종교는 이제 인간의 사적(私的) 윤리 영역에 제한되었다.

신앙이 주관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후퇴하면서 신앙언어는 빈곤해지고, “이제 세상에는 신이 없고, 신에게는 세상이 없는 것같이 되었다”고 서공석 신부는 말한다. 니체가 지적한 대로 ‘신은 죽었다.’ 그러나 신 없는 세상은 ‘허무의 심연’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니체가 남긴 다음 말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이 대지를 태양으로부터 떼어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이 대지는 이제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곳을 향하여 움직이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뒤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공허를 통하여 지나가듯 길을 잃고 있지 않은가? 우리 얼굴에 위에 공허한 공간의 숨결을 느끼지 않는가? 더 추워지지 않는가? 밤이 오고 점점 더 어두워지지 않는가? 아침부터 벌써 등불을 밝혀야 하지 않는가?”

서공석 신부는 “과거에는 니체에게서 불신(不信)밖에는 보지 않았다”며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신비가 사라지면 인간의 신비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전한다. 이제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나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없다면 인간은 천재적 동물로 전락하고, 정의를 위한 갈구도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점에서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라고 말하는 서 신부는 “신의 부재는 세속화된 문화권이 지닌 상처”라고 말한다.

"..인류문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리석음, 거짓, 아집, 횡포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일하심을 믿는 사람들의 관대한 실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신학연구>지는 사라져도 그것을 위해 집필해 주신 분들, 출판해 주신 분들과 그것을 애독해 주신 분들의 선하심은 응집되어 새로운 신앙과 교회를 위해 가시화될 것을 믿습니다."

신의 부재 안에서 기도하는 신앙인

이런 상황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나 계시되었다는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는 서공석 신부는 이미 발생한 신에 대한 언어 역시 해석적 비판을 거치지 않으면 “현대인에게 독선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이 될 것”을 경고한다. 아울러 인류 역사에서 신에 대한 언어전통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지속적으로 신에 대해 질문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시대 안에서, 신학이란 새롭게 제기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하는 노력이라고 정리한다.

덧붙여, “신앙인도 비신앙인과 마찬가지로 신의 부재를 체험한다”면서, “신이 계시지 않음을 체험하면서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의 무신론이 아니라 각각 자기 안에 있는 무신론”이라고 전했다. 이는 신학에 대한 겸손한 자세를 요청하는 것으로, 서 신부는 “신에 대해서 다 알아들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이 있다면, 그 신학은 신을 해치고, 그분에게서 신성을 박탈하여,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놓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영원한 문제 자체”이며, 신학의 목적은 “하느님의 신비를 신비로 이해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결국 신학은 인간과 이 세상의 실재를 이해하려는 투쟁이며, 그 투쟁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차원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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