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변영국]

올 봄에, 녹색연합 인천지부에서 밭 다섯 평을 분양받을 때만 해도 ‘그까짓 다섯 평에 뭘 심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처음 심은 열무와 상추를 다 먹고 이제 배추를 심으려고 삽과 호미로 땅을 갈아엎고 두엄을 줄 때가 되어서는 ‘웬 걸 다섯 평이나 받아가지고... 사람 잡네 이거...’ 하는 절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밭 다섯 평에 자란 잡초를 뽑고, 그 위에 유기농 비료를 한 포대 뿌리고 삽으로 한땀 한땀 떠서 뒤집어 주기를 몇 시간 하고 나자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고 딸아이는 그 작은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딸네미한테도 내가 하고 있는 노동과 같은 분량의 노동을 강요했던 것이다. 

더구나 초여름에 나는 그 밭에서 엄청난 수난을 당한 바 있다. 전날 마신 술이 채 깨지 않은 상태에서 고추 심은 곳에 김을 좀 매주려고 밭에 가서 막 웅크리고 앉으려는데 뭔가 매우 둔탁하고 강렬한 통증이 눈에 느껴지면서 동시에 아내하고 딸의 비명이 들렸다.

바야흐로 고추 지지대에 눈을 찔렸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간발의 차로 실명은 면했지만 일주일이 넘게 누르스름한 세상을 봐야 했던 그 때의 기억은 정말 떠올리기도 싫다. 나는 지금도 허리를 숙이거나 뭔가 눈에 다가오는 상황이 되면 손을 얼굴 앞에 대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튼 초보 도시농군의 밭은, 그동안 농사 알기를 뭘로 알고 꺼떡대던 바로 그 초보 도시 농군의 버릇을 완전히 가르치고 나서야 50포기의 예쁜 배추를 선물했다. 그야말로 예쁘긴 정말 예쁜 배추였다. 게다가 그 귀여움이라니.. 우리 밭의 배추는, 여느 배추의, 정확히 4분의 1 크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 배추로 내 가족을 위해 내가 김장을 담아 주기로 결심했다. 냉동실에는 장모님이 주신 고춧가루가 뭉텅이로 있었고 귀여운 배추가 50포기나 있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게다가 작년에도 나는 배추12포기를 사 직접 절여서 김장을 담았던 경험이 있다.

우리는 우선 일을 분담했다. 배추 자르고 절이는 일은 내 지휘 하에 세 식구가 같이 하기로 했고 시장을 봐서 배추 속을 만드는 작업은 온전히 내가 하기로 했다. 아내하고 딸은 (너무너무 귀한 사람들이므로) 그냥 배추 속 넣고 맛보는 일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두 여인은 정말로 배추 속 넣고 맛보는 일만 했다.)

우선 우리 밭 옆의 커다란 밭에서 배추와 무를 재배하시는 할머니에게 무를 넉넉하게 샀다. 무가 천 원에 세 개였는데 엄청나게 달았다. 그리고 아내가 일하러 간 사이 나는 석바위에 있는 시장에서 쇼핑을 했다. 작년에 비해서 생새우가 물이 좀 안 좋은데다가 비싸기까지 해서 너스레를 좀 떨었다.

“이거 이래가지고 김치가 시원해지기는커녕 고랑내 나는 거 아니에요?”
“아유 아저씨 덩치는 산 만하면서 뭘 그렇게 쩨쩨하게 그래. 아침에 받아온 거야..”
“아 새우가 관상이 단명상인가 왜 아침에 왔는데 점심때도 안 돼서 유명을 달리해?”
“아 이양반아 내가 알아? 다른 데 가도 다 마찬가지야. 새우가 안 잡힌단 말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새우가 귀했다.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새우를 사고 생강도 조금 갈고 새우젓도 좀 사고, 쪽파에 대파를 사고 갓이 조금 값이 헐하기에 넉넉히 사서 집에 왔다. 물론 집에는 제사 때 쓰고 남은 커다란 배 하나, 까나리 액젓, 새우젓, 찹쌀 등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선 다시마와 멸치 육수를 넉넉히 내서 그 육수에 찹쌀 풀을 만들었다. 다른 집에서는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쌀의 형태가 남아 있도록, 말하자면 되직한 죽을 쑨다. 그리고 무를 강판에 갈아 고춧가루를 뿌려 순을 죽여 놓고 거기에 모든 양념들을 넣고 버무렸다. 굴이 안 들어간 것이 아쉬웠지만 사실 굴이 들어가면 김치가 일찍 무르게 되는 폐단도 있다. (우리는 김치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김장 속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생강과 마늘의 양을 여하히 조절하느냐 하는 것인데 잘못하면 정말 이상한 김치가 되기도 한다.

갓이 압권이었다. 싱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이놈이 효자 노릇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속을 마련하고 절였던 배추를 꺼내 체에 받쳐 놓고 양념 두 다라를 준비해 놓고 두 여인을 불렀다.

두 여인은 신나게 속을 넣었고 도중에 나는 저녁나절 잠깐 푼돈 벌이를 하러 나갔다. 나중에 남은 무를 널찍하게 썰어 설렁탕집 깍두기같은 깍두기 까지 만들어 놓고 나니 마치 한 살림 장만한 듯 뿌듯했다.
아아.. 잘 익어야 할텐데...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 익었다. 다른 집에 선물을 줘도 될 만큼 맛있게 익은 것이다.
아 우리 김치.... 정말 무지무지하게 맛있다...

이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정말이지 권하고 싶다. 김장을 하자. 어설프게 도와주는 거 말고 그냥 도맡아서 한 번 해 보자. 이왕이면 내가 농사지어서 한 번 해 보자.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난뱅이인 나도 하는데 나름대로 멋지게 세상을 살아 온 여러분들이야 더 말해서 무얼 하겠는가. 김장을 해서 그 김치를 먹을 때 마다 아내와 자식이 보내는 신뢰와 사랑의 눈길을 받아보자. 이 세상 어떤 선물이 그것을 제쳐낼 수 있더란 말인가...

실명의 위기를 넘긴 보람이 있다.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쭈그리고 앉았다가 더위를 먹은 보람도 있다. 쥐꼬리도 못되는 푼돈벌이에 전전긍긍하는 보잘 것 없는 가장에게, 무한 사랑의 눈빛을 보내주는 사랑스런 가족이 있기에 나는 진정 행복하다. 아껴아껴 먹어야지 맛있는 김치......

변영국(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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