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장동훈]

▲ 마사쵸(Masaccio)작 '낙원에서의 추방' 1425, 피렌체.
여행 중 우연히 만난 벽화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작은 경당에 예수의 죽음 후 사도들의 에피소드를 늘어놓은 벽화 사이에 생경스럽게 생식기조차 가리지 못한 벌거벗은 인간이 있다. 여인은 엉엉대며 울고 있고 사내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어찌 이리 초라한지. 사내는 노동을, 여인은 출산을 형벌로 받고 진노의 칼을 휘두르는 천사에게 쫓기는 고단한 존재가 되었다. 에덴동산의 풍요로움과 영원속의 불멸은 이제 없다. 곤궁함과 고된 노동, 말라갈 육신만이 저 문간 너머의 그들을 기다린다. 안타깝고 측은하다.

309일의 하늘쪽방 살림을 접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김진숙이란 여인이 뭇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위로받았다. 그때, 지상으로 폴짝 뛰어 내리듯 크레인의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는 여인의 사진을 바라보며 하필이면 언젠가 보았던 벌거벗은 인간의 그림이 떠오른 건 왜일까?

하늘에서의 309일에 많은 이들이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내게 그의 309일은 내 몹쓸 육신에게 집중하게 한 시간이었다. 산다는 건 무엇인지, 말라 없어질 육신덩어리가 무엇인지 그의 옴짝달싹 못했을 극한의 시간이 자꾸 의미를 물어왔다. 벽화 속 벌거벗은 저 살덩이가, 형벌과 저주를 뒤집어쓴 저 육신이 무엇이기에 저리도 처절하게 하늘에 매달려있을까 생각했다. 사는 게 참 얄궂다싶었다. 바람이라 불라치면 춥고, 따가운 햇볕 아래서 헉헉대며, 배고프고, 끝없이 욕망하고, 기습처럼 찾아오는 욕정에 잠을 설치며, 그 욕정에 자책하는 이 부질없는 육신덩어리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물었다. 에덴에서 쫓겨나던 저 ‘첫 인간’이 받은 형벌의 육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진숙, 그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궁핍과 고된 노동이 기다리는 지상에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벌거벗은 나신도 아니었고 얼굴을 감싼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화사하게 웃고 환호했다. 벽화 속 형벌의 육신을 무겁게 짊어지고 나오는 첫 인간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시금 정리해고와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하고 있는 것들의 오만과 횡포에 눈물져야하는 이 몹쓸 육신같이 부질없는 인간들 사이로 돌아왔다. 그것도 화사하게 웃으며. 하늘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유 이외에는 천상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309일 동안 오롯이 지상의 것들을 그 덧없고 부질없는 작은 육신에 담았다. 저 허공 위에서 한 번도 지상의 것들로부터 눈을 때지 못했던 그는 결국 다시 그곳, 인간들 틈새로 내려왔다.

내게 그 모습은 벽화 속 안타깝고 측은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하늘과 땅을 바꾸어놓는 대담함이었고 축복받은 에덴과 형벌의 땅 광야의 경계를 일순간 부질없게 만들 해학이었다. 나아가 소멸할 육신을 뒤집어쓰고 이 지상에 기꺼이 동참한 예수의 연유를 어렴풋이 짐작케 하며 덧없는 육신처럼 비틀거리는 삶의 이유를 알게 한 ‘도치’(倒置), 그것이 김진숙의 309일이다. “저기 하늘나라가 있다. 여기 하늘나라가 있다” 떠들어대도 속지 말라는 스승의 말을 비로소 알아듣게 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에덴은 어쩌면 덧없고 곤궁하며 비루한 ‘지금’ ‘여기’에 이미 와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일까. 벌거벗은 인간들 사이로 펼쳐진 벽화 속 장면은 하나같이 천상과 지상의 삶을 함께 품었던 신인(神人), 예수를 떠나보낸 후 제자들의 지상 이야기로 장식되어있다. 고단한 여행길과 감옥살이의 곤궁에도 인간들 사이 그들의 모습은 화사하고 대담하다. 309일의 여인처럼.

장동훈 신부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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