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수도원 기행-4]

2009년 9월. 서울, 왜관, 부산에서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는 큰 행사들이 왜관 수도원 주최로 열렸다. 여느 때 같으면 우리 같은 유학생들은 그저 이역만리서 뒷소문이나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 외국 손님들이 많이 오시는데, 그래도 유학생들은 꼬부랑 말 좀 할 줄 아니까 귀국해서 일손을 거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왜관에 도착해 나와 블라시오 신부가 맡은 일은 딱 한 가지. '베네딕도 연합회 총재 아빠스 회의' 진행요원을 맡는 것이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사수동 수녀원 내에 있는 베네딕도 영성관 건물을 통째로 빌려 아빠스님들을 모시고 회의 뒷바라지도 하면서 100주년 행사에도 같이 참석하였다. 전 세계 각 연합회의 총재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마치 베네딕도회의 G20 회의처럼 느껴졌다.

우리 오틸리아 연합회의 예레미야 총아빠스나 로마 안셀모 수도원의 노트켈 수석아빠스처럼 한국을 셀 수 없이 방문하셨던 분들은 한국의 모든 것이 편안하고 익숙했지만, 그 외 다른 분들은 영어든 다른 외국어든 실제로는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여기서 과연 어떻게 살아남아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정반대였으니, 그분들 모두 우리 형제들의 유기적인 협력과 사수동 수녀님들의 빈틈없는 서비스에 혀를 내둘렀고, 특히 100주년 음악회에 가서는 어찌나 대단한 감동을 받으셨는지, 떠나시는 날까지 두고두고 화제에 올렸다.

그분들 가운데서 특히나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던 분이 한 분 있었는데, 바로 그레고리오 성가로 유명한 프랑스 솔렘 수도원의 필립 뒤퐁(Philippe Dupont) 아빠스였다. 회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동대구역에 배웅을 가서 역 플랫폼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솔렘에 꼭 한 번 놀러오라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블라시오 신부를 초대했다.

▲ 솔렘수도원 입구.

눈 오는 겨울밤, 성탄절엔 솔렘수도원으로

로마에 돌아오자마자, 나와 블라시오 신부는 필립 아빠스에게 받은 감동이 사그라지기 전 성탄 방학 때 얼른 솔렘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뜻을 모았다. 떠나기 전 안셀모 수도원에 같이 사는 친구 수사들한테 우리가 솔렘 수도원에서 성탄을 보낼 거라고 광고를 했더니 다들 약간씩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곤 솔렘 수도원 방문이 재미있는 체험이 될 거라는 둥 이상한 격려까지 해주었다. 혹시 솔렘 수사님들이 금욕 생활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러는가 싶어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우리가 또 누구인가. 실상을 잘 모르는 수도원을 처음 방문할 때는 결코 일주일 이상씩 머무르지 않는, 그 옛날 방랑수도자들의 지혜를 터득한 지 오래이다.

필립 아빠스께 메일을 보냈더니 곧 답장이 왔다. 우리가 온다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수도원 찾아오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써준 글을 보니, 미지의 수도원을 방문하는 데서 오는 약간의 불안감은 싹 사라지고, 과연 어떻게 살기에 이 고약한 친구들이 솔렘에 대해 시큰둥하게 말했는지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과 모험심이 발동되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솔렘으로 출발했다. 전 유럽에서 폭설로 비행기가 취소되고 기차가 끊기고 하는 통에 공항이고 역이고 온통 사람들로 난리가 아니었다. 파리에서 TGV 기차를 타고 사블레Sablé라는 기차역에 가야 하는데, 기차표를 사고도 도저히 객차 안으로 한 발짝도 못 들여놓을 만큼 기차가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할 수 없이 기차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한참 기다렸다가 다음 기차를 탔다.

그러나 '이제 기차를 탔으니 안심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설상가상으로 TGV가 끝나고 지방열차로 갈아타는 역에서 그만 바보같이 엉뚱한 기차를 타고 말았다. 도착 예정 시간이 됐는데도 기차가 서지도 않고 계속 달리기에, 지나가는 승무원한테 "사블레, 사블레, 어쩌구저쩌구" 하고 말하니까 나보다 자기가 더 놀라면서 사블레 가는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다음 역에 전화하고, 난리가 났다. 그리곤 우리 기차표 뒷면에 우리가 실수로 기차를 잘못 타서 그런 거니까 검표할 때 문제 삼지 말라는 내용을 친절하게 열심히 적은 다음 자기 사인까지 해주었다.

그 승무원이 알려 준 대로 다음 역에 내려서 또 한참 후에나 도착할 사블레 행 기차를 기다렸다. 눈 오는 겨울밤, 이름 모를 조그만 프랑스 시골역 역사에 쭈그려 앉아, 위치도 모르는 수도원을 밤길을 헤매며 찾아가서 어쩌면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를 수사들을 깨울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우리가 기차 안에서 온갖 현대 기기를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 제대로 작동한 탓인지, 수도복을 입은 수사 한 분이 역 플랫폼 앞에 서계셨다. 척 봐도 우리를 마중 나와 계신 솔렘 수도원의 수사가 분명했다. 산타클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 수도원 성당 입구.

▲ 수도원 성당 내부.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구원의 기쁨을 읽는다

역에서 사르트Sarthe 강을 따라 약 3km를 달리다가 강을 건너니 곧바로 수도원이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수사는 수도원 식당 안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우리가 늦게 온다고 따로 챙겨놓은 저녁식사를 온장고에서 꺼내 식탁 위에 차려놓았다.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우리가 앉을 식당 자리를 지정해 주고는 칼, 포크, 숟가락, 티스푼을 돌돌 말아놓은 하얀 식수건과 유리컵 하나씩을 나누어주었다. 솔렘에서는 접시는 공동으로 씻어도 위의 개인 도구들은 식탁에서 적당히 알아서 물로 씻고 식수건으로 쓱쓱 닦은 다음 식탁 아래 자기 서랍 칸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씻은 물을 쭈우욱 들이키면 이로써 초간단 설겆이가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수도원 시간표에 따라 솔렘 공동체 속에 섞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성당 입구로 가니 손님 담당 수사가 우리한테 각각 꾸꿀라(전례 때 수도복 위에 덧입는 커다란 망토) 한 벌씩을 옷걸이에서 골라 주었다. 담요처럼 묵직한 그걸 입고 성당으로 따라 들어가는데 제대 양쪽 기도석에 수사들이 이미 빼곡히 차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아빠스의 신호와 함께 일제히 제대를 향해 좌향좌 우향우 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 절 구하소서!"하는 시작기도를 했다.

기도석에서 수사들 틈에 끼여 나도 자연스레 합장하고 몸을 제대쪽을 돌리니, 저 앞에 우뚝 솟아 계신 아빠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치열한 기도의 전투를 앞에 두고도 아직 비몽사몽인 나를 향해 마치 '나를 따르라'하고 말없이 외치는 듯했다. 그런데 전투는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다. 차가운 겨울밤 공기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머리까지 푹 덮어 쓴 꾸꿀라는 이불처럼 포근했고, 아담한 성당의 부드러운 벽과 기둥을 퉁기며 잔잔히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오 성가 소리는 30분이 지나자 자장가처럼 달콤했다. 이곳을 찾는 신자들은 수사들의 기도하는 표정에서 구원의 기쁨을 읽는다고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전투는 그렇게 한 시간 동안 계속 되고 끝났다.

패잔병처럼 꾸꿀라를 끌며 성당을 퇴장하여 나오니, 아빠스가 다가와 반갑다며 손을 잡고 인사했다. 잠시 살짝 우울했던 마음이 싹 가시면서 내가 지금 어떤 행운의 기회를 누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번쩍 깨달음이 왔다. 아빠스가 우리를 돌봐주라고 부탁하셨는지, 수사 한 분이 방에 찾아왔다. 성탄절 전례 준비 때문에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어서 미안하다며, 저녁에 우리만 괜찮으면 수도원 소개를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날 밤, 그 수사는 수도원 소개 책자를 들고 와서 솔렘 수도원 1000년의 긴 역사를 한 시간 동안 아주 짧게 요약해주었다.

▲ 수도원 묘지.

▲ 수도원 묘지 십자가.

메시지보다 이미지 때문에

그랬다. 우리 왜관 수도원이 작년에 100주년을 기념했는데, 솔렘은 올해 2010년에 1000주년을 기념했다. 물론 유럽 대부분의 수도원들이 겪었던 운명처럼, 이곳 솔렘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수도원은 해산되고 건물들도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솔렘 수도원은 그 버려진 폐허 위에 원래 이 지역 교구사제였던 게랑제Guéranger 신부가 베네딕도회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 세운 수도원이다.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사회 뿐 아니라 교회마저도 중심을 잃고 마구 흔들리고 있던 당시, 게랑제 아빠스는 고대 로마 교회의 전통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는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레고리오 성가의 부흥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레고리오 성가가 베네딕도회의 전유물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원래 그레고리오 성가는 고대에 일반 신자들이 부르던 성가가 수도원 안에 들어와 더욱 발전된 것이다. 나도 CD로만 듣다가 솔렘에 와서 직접 생음악으로 듣게 되었는데, 진짜 CD하고 똑같이 수준급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금도 많은 지친 영혼들이 솔렘 수도원을 찾는다. 새벽부터 밤까지 성당에서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을 들으면 누구라도 신비로운 평화를 느끼게 될 것 같다. 같은 수사인 내가 봐도 정말 이곳 솔렘 수도원의 생활은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에서 본 중세 수도원 분위기가 물씬 느껴질 만큼 고풍스럽다. 왠지 여기야말로 진짜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뭐랄까, 뭔가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약간 불편한 느낌도 있었다. 내가 수도원에 벌써 한 이십 년 사는 동안 세속 때가 많이 묻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내 주변의 덕망 있는 수사들도 간혹 솔렘에 대해 나와 같은 느낌을 말씀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내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가끔 왜관 수도원을 찾는 한국 신자들도 솔렘 수도원을 찾는 신자들이 하는 말과 비슷하게, '수사님들의 그레고리오 성가 소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한다. 나 역시 이런 느낌에 몰입되어 아예 수사가 되기까지 했지만, 프랑스의 유명한 루이 부이에Louis Bouyer 같은 신학자는 전례 부흥의 이런 경향에 대해 솔렘 수도원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그런 식으로 옛날 모습을 무조건 그대로 재현해놓고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죽은 개구리에 전기 충격을 가해서 개구리가 파닥파닥 움직이게 해놓고는 개구리를 살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말했으니, 비판도 보통 심한 비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신학적 성찰이 그리 예리하지 못해서 그런지, 나의 경우도 많은 일반 신자들처럼 메시지보다 이미지 때문에 마음이 더 많이 움직이는 편이다. 솔렘 수도원 전체에서 풍기는 거룩한 이미지들이 나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내가 아주 예전에 느껴봤던 수도생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내 안에서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이미 죽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아직 살아있지만 잠들어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솔렘 수도원에서 받은 아름다운 충격 덕분에 그때 내 심장이 찌릿찌릿, 내 사지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 수도원 식당.

▲ 수도원 정원.

영성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삶의 리허설

마침내 일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다. 솔렘에 있으나,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 있으나 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늘 기도하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찾는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끔 성가 부르는 것이 고역일 때가 있다. 노래할 때 음이 제대로 안 맞아서 서로 눈을 흘길 때도 생긴다. 아주 가끔은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화도 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때 나는 느낀다, 내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깨닫게 된다, 영성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삶의 리허설이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삶의 본무대라는 것을.

솔렘 수도원만큼 그레고리오 성가를 잘 부르지는 못해도 우리 왜관 수도원에 살면, 바로 이렇게 참고 인내할 게 많아서인지, 개구리가 펄펄 살아서 뛰어다니는 것 같다. 천 살 잡수신 노인의 입장에서 볼 때, 백 살 된 어린아이의 모든 질풍노도는 행복한 성장통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솔렘 수도원을 부러워하면서도, 솔렘 수도원이 아닌 왜관 수도원에 더 큰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 사진제공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