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사계절, 2011

“삶의 고뇌가 쌓인만큼 타인의 고뇌가 읽힌다고 했던가요? 페이지 마다 절절하게 아로새겨진 알지 못하는 저자의 고뇌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제 마음이 젖어듭니다.”

▲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사계절, 2011
철학자 강신주 씨가 ‘인문학 카운슬링’이라는 부제를 달고 펴낸 책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2011)이다. 여기서 강신주는 엄청난 시공간을 넘어 책의 저자들과 접속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유리병 편지’처럼 누군가의 삶의 기슭에 닿아 읽히고, 누군가의 삶과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싶은 것이 모든 저자들의 마음임을 알아차린다. 강신주는 그렇게 책을 통해 받은 ‘유리병 편지’들을 읽고 제 삶에 견주어 보고 다시 글을 써서 ‘유리병’에 넣어 다른 책으로 내보내고 있다. 그에게 먼저 유리병을 띄워 보낸 이들은 스피노자이고, 장자이며 나가르주나이고, 원효였다.

그중에서 강신주는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이란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정수를 길어올린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란 책에서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썼다. 이는 그리스도교도 그대로 적용되는 ‘조롱’이라고 전한다.

강신주는 먼저 예수의 정신이 중세 가톨릭교회를 통해 ‘비극’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신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교회에서 ‘면죄부’(대사부)를 사야했다. “신과 신의 아들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결국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 심지어는 원수마저도 사랑하려고 했던 예수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묻는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을 새롭게 살려고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출현했지만, 불행히도 지금 개신교는 자신이 탄생한 이유를 망각하고 있다고 강신주는 비판한다. 개신교는 헌금 액수를 상황판과 주보를 통해 공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경쟁을 유도하는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예수의 정신은 ‘희극’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교회만을 다녀야 하고, 가톨릭처럼 성직자를 거쳐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강요받는다.

육친을 넘어선 ‘하느님 아버지’란 말의 혁명성

여기서 강신주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언급하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이 지닌 혁명적인 힘을 간파한다. 그것은 ‘육신을 낳아준 아버지보다 우리의 영혼을 창조한 하느님이 진정한 아버지’라는 선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가족, 민족, 인종이라는 육체적 구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을 유일한 아버지의 피조물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지역종교가 아닌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다. 이제야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가진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로마인은 원수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두 자신의 피조물, 즉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

강신주는 여기서 세 명 자식을 둔 아버지를 예로 든다. 세 자식 중에서 막내아이가 장애인이라면, 아버지는 당연히 막내아이에게 가장 애정을 기울일 것이다. 만일 다른 두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막내동생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아버지가 흡족해 하리란 걸 안다. 강신주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묻는다. 당연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노동자일 것이며, 그중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일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라면 여성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 시몬 베유.
그런 점에서, 강신주는 역설적으로 예수의 정신은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에 있지 않고 ‘해방신학’의 전통에 있다고 전한다. “해방신학에 따르면 노동자, 빈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면, 누구도 자신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자임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강신주는 프랑스 여성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을 기억하자고 권한다. “그녀는 억압받는 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웃을 도와야 한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되기를! 불행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인이 보낸 노예가 될 것. 주인으로부터 오는 도움은 노예를 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을 향한 것이다.”(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강신주는 아내 대신 무거운 짐을 들거나 청소 한 번 해보지 않고 “내 마음 알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라고 속삭이는 남편의 고백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몸으로,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그 사랑은 극한에 도달한다. 이처럼 생명을 주는 행위는 사랑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데, 생명을 얻은 타인이 대가를 주려고 해도, 이미 그를 위해 죽은 사람은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주었던 예수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극한이며 표준”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랑하면, “나의 자아는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된다.” 강신주는 그리스도교 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신의 자식’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행한 사람에게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시몬 베유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했던 노예,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는 시몬 베유 뿐 아니라 이 책에서 이지의 <분서>를 통해 ‘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을 살피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발견한다.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사람은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 짖어"대고 "만약이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지만, 깨달은 자의 ‘맑은’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한다.

지금처럼 사람들 사이에 속물적 근성이 켜켜이 쌓이고, 물신에 사로잡힌 정권이 천연덕스럽게 호령하고 있는 사회에서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책을 통한 이 여행길에 우리 역시 동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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