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맹주형]

몇 일 전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짓는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은 오랜 시간 알코올 중독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 있다가 나와 전화를 주신 겁니다. 고된 농사일에 농부들이 술을 자주 먹는데 형님은 그 정도가 심해 가끔 병원신세를 집니다.

형님은 병원 나와서 오랜만에 아는 분들과 어울려 술 한 잔 드시며(드시면 안 되는데...) 제 생각이 나 전화 주셨다 합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형님이 감귤을 가톨릭농민회에 내는데 지난 해 무농약 인증이 아닌 일반 감귤을 보내 지금 농사일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뒤로 형님은 또 술 때문에 병원에 들어가셨고 그 후 처음 통화를 하게 된 겁니다. 형님은 전화로 오히려 저를 걱정해주십니다. 술 많이 먹지 말라고...

이윽고 혼잣말 비슷하게 그 감귤은 동생 감귤이었는데, 동생은 위독한 상태였고 또 동생의 귤이 ‘무농약’이라 하여 믿고 형님 박스에 넣어 공급해준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었다고... 신부님한테도, 우리농 식구들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결국 그 동생은 죽었다고... 전화로 말씀하십니다. 그날 다 저녁 흐린 날씨 속에 저 바다너머 제주에서 전화로 들려오는 형님의 슬픈 목소리를 들으며 저도 한없이 가라앉았습니다.

4대강 난민, 서규섭

▲ 서규섭 씨.
팔당 두물머리 유기 농지를 지키는 농민들 가운데 저와 동갑내기 농민이 한명 있습니다. 서규섭 농민. 물론 저와 서규섭 농민이 함께 서있으면 사람들은 모두가 제가 한참 선배인줄 압니다. 모두다 저의 빛나는 외모 덕분입니다. 팔당 유기 농지를 없애려는 나쁜 이명박 대통령과 망언 김문수 도지사 덕분에 만난 좋은 인연입니다. 함께 마음도 나누고 술도 나눈 지 벌써 두해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집에서 서울 가는 버스 기다리다가 서규섭 농민이 페이스 북에 적은 글을 우연히 읽었습니다. 지난 주 이명박 대통령이 전 세계 유일무이한 자전거길 개통하려 팔당에 온 날 소회를 적은 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본업인 농사 잠시 뒷전으로 미뤄놓고 4대강반대와 농지보전 운동에 몇 달 바짝 매달리면 어찌 되겠지, 설마 자전거길이나 공원 만들려고 수 십 년 유기농 땅을 뺏을라구... 이랬던 것이 벌써 3년째다. 4대강 난민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몸도 마음도 오그라드는 듯 하다. 좀처럼 이러지 않았는데 심한 악몽에 발버둥 치며 잠을 깨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

그날 아침 규섭 씨 글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3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당유기농지보존 싸움에서 막내지만 가장 굳건히 몸으로, 잘생긴 얼굴로, 날카로운 논리와 언변으로 싸움의 중심에 늘 서있는 규섭 농민이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고통 받고 있었다니... 4대강 난민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힘겨워했다니... 참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딴에 위로한답시고 댓글에 “규섭 씨, 대학 때 이런 노래 즐겨 불렀었죠. “내 가는 이길 험난하여도 그대로 인하여 힘을 얻었소. ... 무엇이 두려우리오. 그대 곁에 내가 서 있소. 우리 가는 길 외롭지 않소” 하는 노래... 힘내세요!”하고.

언제 부턴가 저는 슬픈 영화를 잘 보지 못합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가운데 우리 사회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소개하는 ‘동행’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저는 함께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봉사도 많이 했고, 또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했는데 우습게도 이젠 슬픈 사람들의 모습과 슬픈 이야기조차 보고 듣기 힘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 그때부터였습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때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과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뒤로 마음 한구석, 힘든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을 숨기고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는 슬픈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는 제주도 농부 형님, 팔당 두물머리에서 힘겹게 유기 농지 보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동갑내기 규섭 농민과 남은 농민들, 얼마 전 교통사고로 힘들어하는 청천농민회 일꾼 석현 형님...등등.

▲ 두물머리에서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에 생명평화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야

이제 얼마 뒤면 서울 시장을 뽑습니다. 저는 정치에는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습니다만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박원순 씨를 보면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랜 시간 시민사회운동을 하며 가난하고 힘들고 슬픈 이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주려 노력한 점이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모습 그대로 선거운동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모든 것은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수년 전 안동 가톨릭농민회 쌍호 공동체 형님들이 박원순 씨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형님들은 박원순 씨와 만나 자신들이 인터뷰하였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삼아 이야기해, 제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알기로 당시 박원순 씨는 공동체에 대한 책을 내고자, 이 곳 저 곳 현장 공동체들을 방문하고 다닐 때였습니다. 박원순 씨를 만난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명ㆍ공동체운동이 올바르게 평가되고, 대안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한테 그토록 자랑하신 거죠.

박원순 씨는 아마도 힘겨운 농민들과 서민들, 본인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대안을 마련하고, 그 대안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원순 씨를 보며 이젠 우리 사회도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대안으로 생각했던 작은 삶의 모습들이 이제는 하나씩 하나씩 세상에 드러날 때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이제 저도 좀 더 슬픔에 강해져야겠습니다.

맹주형 (아우구스티노)
천주교 환경사목위원회 교육기획실장, 4대강사업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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