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훈의 좌충우돌 노래야그-7]

<비틀스(The Beatles), 제프 벡(Jeff Beck),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김광석, 이문세> 대중음악을 조금이나마 접한 이들에겐 친근한 이름들이다. 하지만 <조지 마틴(George Martin), 퀸시 존스(Quincy Jones), 조동익, 김명곤> 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숙한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비틀스의 Yesterday, In My Life등 비틀스의 거의 모든 앨범제작과 제프 벡의 Cause We've Ended As Lovers를 앨범 프로듀서가 조지 마틴이다.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Thriller 앨범의 프로듀서는 퀸시 존스이다. 김광석 뒤에는 조동익이 있었고, 이문세 뒤에는 작사, 작곡자 이영훈도 있었고 김명곤이라는 프로듀서가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음악앨범 뒤에는 우리 눈에 잘 드러나지 않게 숨어서 도와주는 이가 있다. 가톨릭 CCM앨범에도 그와 같은 프로듀서가 있다. 음악감독(Music Director)이자 프로듀서(Producer). 오늘은 그 중 한 명을 만나보자.

수원가톨릭대학교 신학부 '갓등중창단'이 불렀던 ‘딜레마’, ‘눈물이 흘러도’,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PBC 평화방송 창작생활성가제의 앨범들, 수많은 가톨릭 생활성가 앨범, 신상옥과 형제들, 고영민 손현희, 장환진, 김태진 신부, 현정수 신부와 이노주사, 김성훈 신부와 나무와 숲, 김종성 신부 등, 수많은 앨범의 숨은 조력자! 음악 프로듀서, 기타 연주자, 노래하는 가수, 방송진행자까지 두루 하는 사람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일곱 번째 만나는 손님이다. 유승훈 프란치스코 형제다.

▲ 공연을 앞둔 리허설. 유승훈 프란치스코

또 하나의 세계

유승훈 프란치스코 형제를 만나러 인천 작전동 근처 공원에서 그와 나눈 대화를 몇 자 적어본다. 늘 시작은 “오랜만에 보네”라는 말로 시작해서 “나중에 술 한잔 해요”라는 말로 끝난다. 그와 20년 넘게 지내왔지만,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형 오랜만이야. 잘 지내죠? 형은 나에게 중고등학교 주일학교 선생이었고, 형의 기타반주가 있는 미사는 늘 감동이었고, 형 때문에 나 또한 가톨릭 음악을 하게 됐는데, 어찌 보면 형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가게 한 사람 중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지.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야?”

“상훈아. 내가 예전에 얘기했는데, 너가 기억을 못 하는 구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평범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지. 부모님께서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거든. 마치 새장 속에 새처럼. 내가 선천적으로 몸도 온전치 못하고―유승훈 프란치스코 형제는 생후 1개월 때 소아마비가 왔다.―공부도 잘해서 애틋하게 여긴 것 같아.

나도 부모님 말씀이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했고,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지. 4살 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세상엔 2등이면 낙오자고 1등만이 살아남는다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셨지. 박정희 군사문화 때처럼 그런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계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거야.

근데 중학교 입학 후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자연스레 새로운 세상에도 접했지. 나에게는 충격과 즐거움이 함께 왔지. 반항의 도구라고 할까? 그게 음악이었지.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를 좋아하게 되고, 고등학교 가서 ‘정적’(靜寂) 이라는 하드락(Hard Rock―70,80년 강력한 기타소리를 기반으로 한 밴드음악)을 하게 됐지.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무’(無)라는 밴드―Vocal 유승훈, Drum 박성호, Guitar 강신수, 금동철, Bass Guitar 한성호―를 조직해 직업적으로 활동하게 됐지. 그 당시는 하드락이 유행이었거든. 하지만 헤비메탈은 나에게 맞지 않는구나 생각하게 됐어.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의 노래를 할 수 없는 거야. 그때 메탈음악을 접게 되었지.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상옥(신상옥)이 형을 만나 본격적인 가톨릭음악을 하게 된 거야.”

그가 6살 때 아버지께서 기타를 사주셨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야구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기타는 그에게 야구이자 기쁨이었다고 한다. 주일이면 식구들과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전부였고, 기타가 전부였고, 레코드판이 전부였고, 식구들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때까지(중학교 2년) 유승훈 씨의 세상 전부는 가족과 함께 한 방안이 전부였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새는 알을 까고 나와야 함을 느낄 때 그러하듯, <구토>의 로캉탱이 마로니에 나무뿌리에 놀라 세상을 바라봄이 그러하듯, 그는 자신이 살던 세계에 관해 충격과 심한 구토증상이 오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설사 그것이 어른들이 가로막는 세상일지라도, 그때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했다. 또 다른 세상을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아버지를, 세상과 처음 맞닥뜨린 그에게 음악은 새로운 탈출구였고, 또 하나의 세계였다.

지하 연습실과 신상옥과 형제들

“아버지께서는 내가 음악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지. 근데 결국엔 아버지께서 포기하셨어. 반항과 악으로만 뭉친 내게 선물을 주신 거지. 우리집 지하에 밴드연습실을 만들어 주셨어. 내게 최고의 선물이지. 세상 아버지가 다 그럴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고맙지. 이십 대 초반을 하드락 공연으로 보냈고, 그러다가 강원도 고성에서 공연하던 중 상옥(신상옥)이 형에게 전화가 왔어. 음악을 같이 해보자는 전화였지. 그래서 지금의 가톨릭생활성가를 하게 된 거야.”

1992년 부천시 심곡3동성당(現 심곡부활성당)에서 형, 동생처럼 지내던 유승훈, 신상옥은 그렇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음악을 통한 피정센터가 목적이었지만, 공연과 앨범을 하면 할수록 피정센터의 꿈은 공연의 기쁨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신상옥과 유승훈이 모이고 그들 형제가 모이고, 그들 지인들이 만나 1992년 수화음악회를 시작으로 ‘신상옥과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 신상옥과 형제들, 2008년 경북 김천성당에서, 왼쪽부터 신상옥, 신상훈, 유승훈

그는 옛일을 회상하듯 말하기 시작한다.

“낙산중창단 1집에 있던 ‘영산강’이라는 노래를 좋아했어. 그 노래를 들으면 외롭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져, 그 노래 많이 불렀지.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생들이 만들었던 ‘임 쓰신 가시관’ Tape는 가톨릭생활성가의 축복인 것 같아. 그 축복이 내 인생도 바꿔놓은 거야. 상옥이 형이 처음 음악 하자고 했을 때, 바로 오케이 했지.”

영산강
(글 이봉신, 곡 문승현)

차라리 울어 볼꺼나, 이 칙칙한 어둠 몰고
소리없이 숨죽여 울어 볼꺼나
차라리 돌아 설꺼나, 무너져내린 설움 안고
여윈 허리 보듬어 돌아설꺼나
밤마다 산마루 넘어와서 시커멓게 다가와
두 손 내미는 못다한 세월
밤마다 산마루 넘어와서 시커멓게 다가와
두 손 내미는 못다한 세월


Producer & Music Director 프로듀서와 음악감독

갓등 4집 <그 나라가 임하도록> 앨범 작업이 유승훈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게 되는 앨범이었다. 신상옥과 형제들의 공동 편곡 작업이 신상옥 씨의 바쁜 일정 탓에 유승훈 씨에게 많은 부담과 함께 기회가 왔다고 한다. 그는 편곡에서부터 베이스기타, 일렉 및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일정관리까지 신학생들과 돈암동 스튜디오에서 일주일간의 작업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 나라가 임하도록> 앨범이 내 이름을 걸고 하게 된 사실상 첫 번째 앨범이야. 상옥이 형이 얼마나 바빴는지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인트로(시작, 전주, intro) 부분의 전주 녹음할 때 잠깐 본 기억만 나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 당시 우린 각자 서로 바빴어. 아마 서로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단계였던 것이지.”

그후 그는 부천 중동에 조그마한 녹음스튜디오를 만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만의 음악을 하나 둘 만들어 간다. 수원교구 현정수 신부가 이끄는 ‘이노주사’ 1, 2집을 비롯해 수원교구 김태진 신부의 모든 앨범, 평화방송 창작생활성가제 앨범 등 다양한 앨범들의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적응되고 길들면 오히려 편하기도 해. 1996년부터 그랬다고 봐. 상옥이형도 자기의 길을 가듯이 나도 나의 길을 가기 시작했어. 유승훈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의 색깔이 담긴 음악을 후배들과 만들어 가기 시작했어. 부천 스튜디오가 점차 커지고 나에게 편곡과 앨범 디렉터를 맡기는 이들이 많아졌지. 자연스레 음악 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 이형진, 권성일과 2001년도 신당동 녹음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가톨릭 문화기획사인 ‘띠앗누리’를 만들기도 했고, 그들과 평화방송에 관계된 방송진행도 하게 됐지.”

한 시간가량 둘만의 얘기가 지나간다. 옆에 함께 있던 윤순 로사리아 자매와 김정수 기타리스트 친구가 잠시 얘기를 식힐 겸 음료를 사온다. 쉬어 가는 이야기로 녹음에 관계된 이야기를 잠깐 한다.

하나의 앨범작업을 하는데 제작비가 어느 정도야?

“형. 보통 앨범 한 장 만드는데 돈은 어느 정도 들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음악앨범(통상CD 2000장 기준)을 만드는데, 녹음기획부터 편곡, 악기구성, 세션맨(연주자), 녹음실, 녹음엔지니어, 녹음, 믹싱(악기와 노래를 배치하는 작업), 마스터링(1차 믹싱된 자료를 CD로 만드는 작업), 앨범 디자인 및 재킷, 부대경비(녹음 시 사용되는 판공비)를 모두 합치면 어느 정도 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 좀 해봐. 아마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거야.”

“일단, 녹음실 사용료가 제일 중요해.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작업 단계지. 통상 녹음실 사용료는 실력과 녹음 장비에 따라 A~C급까지 나뉘고, 1 Time(3시간 30분)을 기준으로 45만 원~15만 원 정도 하지. 엔지니어 인건비는 따로 구분하고, 통상 엔지니어는 1타임 기준으로 5~8만 원 정도 해. 한 앨범 하는 데 필요한 녹음실 사용 횟수는 30타임 정도 되지. 얼추 계산해 보면 최소 600만 원(15만 원*30 + 5만 원*30)에서 많게는 1,590만 원(45만 원*30 + 8만 원*30) 들어가지. 60분짜리 CD 한 장에는 약 12곡이 들어가는데, 그 모든 곡을 악기연주부터 노래 녹음까지 30타임에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하지만 30타임에 끝나기는 어려워. 더 하면 했지 덜하지는 않거든.

녹음실 사용료는 그 정도면 되고. 이제 편곡비는 곡당 20만 원은 잡아야 하고, 연주자 비는 한 사람이 1타임당 15~50만 원 정도 해. 한 앨범에 보통 연주자 1인당 3타임은 사용해야 앨범이 나오게 되거든. 얼추 계산해 보면, 편곡비 240만 원, 연주자 1인당 45~150만 원 정도 나오니까. 연주자 최소 5명(드럼, 베이스기타, 기타, 건반, 그 외 악기)을 기준으로 하면, 225~750만 원이 나오게 되지.

하지만 브라스(금관악기, Brass)나 목관악기(플루트 외) 혹은 현악기(바이올린 외)등등 클래식악기를 쓰면 그 금액은 더블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클래식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녹음계산에서 제외한 금액이야. 악기녹음과 노래녹음이 끝났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니지. 노래녹음 또한 합창과 코러스가 들어가게 되면 그 금액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 당연히 부대경비(식비, 회식비 외) 또한…….

녹음이 끝나면 일차적인 녹음작업이 끝나게 되지. 하지만 앨범작업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거든. 녹음된 모든 소스(악기, 노래)들이 원활하게 분배되고 각자 위치에 맡는 배열이 필요한데 그것을 해주는 것이 믹싱(mixing)작업이야. 이 작업은 보통 200만 원 정도에 하게 되지. 물론 믹싱엔지니어 비용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리고 믹싱작업이 끝나면 마스터링(mastering)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CD를 만드는 작업이야. 믹싱된 소스를 볼륨값과 사람들이 들었을 때 가장 편안한 소리로 만들어 주는 작업을 하게 되지. 이 작업은 통상 100만 원 정도에 이루어지지. 그리고 한 앨범을 작업할 때 부대경비도 무시하지 못하는데 100~200만 원정도 예상하면 될 듯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범 디자인과 앨범 재킷을 만드는 작업을 거치는데, 통상 CD 2000장을 기준으로 300~500만 원까지 들어. 얼추 정리되지? 이것을 통 합치면 앨범제작경비가 나오지.”

그와 나눈 얘기를 도표를 통해 보자. 녹음실 작업환경과 사람들의 실력에 따라 각각의 등급이 나뉜다고 한다. 통상 A, B, C라는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 된다고 한다.

구분/급

A

B

C

A, B, C의 구분은 작업환경과 사람

편곡

480

460

240

12곡을 기준으로 함

연주자

750

450

225

연주자 5명, 3타임을 합한 금액

녹음실 30타임

1,350

750

450

1타임=3시간 30분. 총 30타임을 기준

엔지니어

240

200

150

30타임

믹싱

300

250

200

 

마스터링

150

120

100

 

디자인 및 재킷

300

200

100

디자인, 종이질, 종이매수

CD 2,000

300

200

120

포장지에 따라 가격 차가 남

코러스

200

100

50

대략적

브라스, 목관악기

200

100

50

대략적

클래식악기

300

200

100

대략적

부대경비

300

200

100

대략적

 

 

 

 

 

총합

4,870

3,230

1,885

단위: 만원

그와 앨범 작업에 관계된 이야기를 마치고 나름대로 정리한 표이다. 그는 보통 가톨릭생활성가 앨범 작업을 할 때, 500만 원에서 2,000만 원 내에서 모든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작업환경과 연주자 실력이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기 때문에 최소한 B급 이상의 녹음작업환경 속에서 작업한다고 한다. B급이라 해도 3,200만 원이라는 금액이 나오는데, 어떻게 최소금액인 500만 원과 2,000만 원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유승훈 형제와 윤순 자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상훈아. 너도 알듯이. 돈이 없는 게 제일 문제야. 앨범을 만들고 싶어도, 그들에겐 돈이 없는 거야. 하지만 만들어야 하거든. 녹음실 타임을 줄이거나, 악기를 줄이거나, 혹은 다른 손해를 보면서까지 작업을 해야 해. 앨범 작업하는데 보통 한 달 정도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앨범작업하고 나면 나에게 들어오는 금액은 50만 원이 안될 때도 많아. 그래도 해야 하거든. 난 녹음작업이 재밌어. 재미라도 없으면 못하지. 정말 못하지.”

옆에 함께 이야기하던 윤순 자매가 말한다.

“오빠. 이 바닥에서는 퉁(쇼부) 친다고 하잖아요.―일본말인 ‘쇼부(승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넉넉히 2,000만 원 정도만 돼도 앨범을 전체적으로 업 시킬 수 있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보통 1,000~1,500만 원 정도에서 제작되고 있어요. 앨범 전체적인 완성도 또한 떨어지지만, 그에 따르는 편곡, 연주, 디자인에 관한 각자 스텝들에 대한 손해 및 봉사정신을 강요하게 되죠. 그게 제일 문제인 듯해요. 어떻게 보면 편곡이 제일 중요한 데, 그 부분에 제작자에게 요구도 못 하는 게 지금 실정이에요.”

미사 속에서 생활성가를 부르는 전례가 있으면 좋겠어

교회 안에서는 음악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전례 속에서는 어떤 성가를 불러야 하나? 이것이 성가냐? 저것이 성가냐?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가져야 그것이 성가인가? 도대체 성가라고 부르는 어떤 특정한 틀과 구조가 있는가? 우리가 부르는 성가들을 성음악, 생활성가, CCM, 전례음악이라 부르는 특정 기준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이다.

노래를 부르기 전 혹은 노래를 만들기 전 많은 이들이 이러한 벽에 부딪히고 싸우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노래와 성가의 본래 의미는 항상 재생산되고 그렇게 재생산된 것들은 새로운 것을 구속하기 마련이다. 어둠 속에 빛이 있다면, 지금은 그나마 여타 다른 종류의 음악들 간의 대화를 통한 협의가 진행 중인 것이 하나의 빛이다. 그런 맥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 본다.

“상훈아! 나는 성음악이니 생활성가이니 하는 싸움은 그리 가치가 없다고 봐. 음악이 사람을 위해 있는 거지, 사람이 음악을 위해 있는 게 아니잖아. 근데 우리는 그런 것들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하물며 밥그릇 싸움까지 하잖아. 이건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 생활성가 하는 이들끼리도 뭉치지 못하는데 다른 성격의 음악 하는 이들과 싸움은 오히려 시간이 아까울 수도 있어.

내가 바라는 것은 전례성가는 이렇고 저렇고 싸움이 아니라, 미사전례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만날 수 있는 미사가 있으면 좋겠어. 가령, 그레고리안성가를 부르는 미사, 클래식음악을 만날 수 있는 미사, 밴드와 함께하는 생활성가처럼 시끄럽더라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날 수 있는 미사. 그러한 시도가 가톨릭에서 자유롭게 펼쳐졌으면 좋겠어.

근데 지금 분위기는 그렇지 못하잖아. 자신의 입장이 교회의 입장인 것처럼 외치는 이들 간의 싸움이 많잖아. 우리가 하는 말로, 서로가 다른 것이지 절대로 틀린 것은 아니잖아. 교회에도 이러한 다양성 있는 전례 속의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어”

교회정신? 참 어려운 말이다!

그에게 기억나는 앨범 및 노래에 관해 물었다. 그는 말한다. 1993년 신상옥과 형제들 첫 앨범 <그 큰 빛 주님 되어>. 1997년 새 미사곡 앨범인 바오로딸에서 제작한 <나는 거닐리라> 앨범 속의 ‘하느님의 어린양’, 이노주사, 김태진 신부의 앨범과 더불어 2004년 납골묘 건립을 위한 자선음반인 <아름다운 무지개> 앨범을 의미 있는 앨범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특히 <아름다운 무지개> 앨범에서는 가톨릭CCM에 몸담고 있는 이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그 앨범에 담긴 하나의 동영상을 준비해 본다.

나도 가톨릭 성가계에 몸을 담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생활성가 관련 이들부터 성음악 관련 이들까지.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것! 하지만 그런 교집합이 있는 반면 서로 간의 차집합과 여집합도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과 함께 서로 간의 차집합 역시 존중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그런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일일 수도 있다. 내가 승훈(유승훈 프란치시코)이형과 순(윤순 로사리아)이에게 말한다.

“순아! 형아! 내가 만난 이들과 혹은 내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녹음작업을 할 때 형과 순이가 만들면 뭔가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 교회 냄새가 난다는 거지. 다른 제작자들과 달리 두 사람과 함께 작업하면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틀을 갖추게 된데. 난 솔직히 이해가 안 되고 또 인정하기 조금 어려운 말들이야. 교회 다니는 이들이 음악을 만들면 그것이 교회에 부합하는 음악이라는 것인가? 그 점에 대해 설명 좀 해줄래?”

먼저 순(윤순 로사리아)이가 말한다.

“오빠. 나, 그 말 뭔지 알 거 같아요. 근데 뭐라고 말해야 하나. 저랑 작업하는 이들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교회와 신자들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성가를 만든다는 얘기를. 저희도 음악 하는 사람이라서 욕심을 내고 싶죠. 더욱더 화려한 편곡과 연주까지도, 하지만 앨범 작업을 하다 보면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교회정신과 신자들의 기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점에 중심을 두고 앨범을 제작하기도 하죠.

좀 더 욕심을 내서 앨범을 만들면 오히려 역작용이 몰아닥쳐요. ‘코드장난이니, 잘난체라니, 기도는 아냐?’라는 말들이 내 귓가에 맴돌죠. 실험적 음악을 하고 싶어도 애써 욕심을 멈추어 버리죠. 하지만 그런 마음은 앨범 제작자에겐 교회정신이라고 생각되나 봐요. 자기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닌 교회에 맞는 음악을 하는 것이.”

유승훈 씨도 말한다.

“그렇지. 내 고집이 들어간 음악이 있고, 타인의 고집이 들어간 음악도 있지. 반면에 교회가 요구하는 음악도 있고. 나는 항상 교회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었지. 젊은이들이 좋아하고 많은 교집합을 끄집어낼 수 있는 음악을 했어. 물론 내 스타일에 맞게.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교회의 요구만은 아냐. 교회가 요구하는 것이 내가 추구하던 스타일 이였다는 거야. 나 또한 화려한 음악, 더욱 실험적 음악을 하길 원해. 하지만 더 많은 이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 그런 점이 순이와 나를 찾는 것 같아”

그들과 두 시간가량 얘기를 하고, 밥을 먹으러 간다. 한우를 먹고 싶다고 했으나, 내가 우기면서 돼지갈비를 먹는다. 내 마음 속에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교회정신]이라는 말.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답다, 교회에 부합하다, 교회정신에 맞다, 전례에 맞다, 그것이 성가다”는 말들이 그것이다. 물론 공동체 및 집단의 다수 의견일 것이다. 삶은 다수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 소수가 하는 실험적, 독창적, 특수한 형태의 것들은 다수의 도마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좌초되거나 숨어 있다가 더욱 강하게 솟구쳐 나온다. 교회정신! 아직도 내겐 어려운 말이다. ‘교회정신’이라는 말! 도대체 누구 것인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 호밀밭의 파수꾼?

고기를 먹으면서 승훈이 형이 이야기를 건넨다.

“상훈아! 나처럼 욕도 많이 먹고 구설에 오른 사람도 생활성가 판을 통틀어 없을 거야.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도 많이 됐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오해도 사고 나쁜 사람 취급도 당하지. 세상 사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닐까? 하지만 난 마지막 꿈이 있어. 성가를 모르는 이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공연도 하고 기쁨도 주는 거야. 산골속, 시골속, 외딴섬, 할아버지 할머니만 계신 곳, 음악이 없는 곳. 그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는 것이 내 조그맣지만 소중한 꿈이야.”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나의 눈빛과 말투가 어릴 적과 똑같다고 했다. 초점 없이 딴 청하는 듯한 눈빛, 뭔가 캐묻는 듯한 농담 투의 말. 남들이 관심 둬 주지 않는 것들을 그는 소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활성가 가수이자 연주자이자 편곡자이자 앨범제작자 유승훈 프란치스코와의 만남 후 내가 그에게 말한다.

“형은 이 가톨릭CCM에서 없어서는 안 될 파수꾼이야. 정말. 세상에 적응하기도 하고 적응 못 하기도 하고, 미움도 받고 때론 분에 넘치는 고마움도 받고, 아주 작은 것들도 기억해 주고,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더 좋은 앨범 많이 만들고. 교회가 요구하는 음악뿐만 아니라 형만이 할 수 있는 음악도 만들기를 바래. 형만의 음악!!! 건강하고. 순이도 잘 가고, 정수도 잘 가. 안녕!”

내가 기억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를 다녔으며, 누구와 연애를 했으며, 누구랑 친하며, 그 사람의 인생관이 무엇인가? 라는 것들. 그것들이 결코 아니다. 나의 입버릇, 나의 초점 없는 눈과 그다지 소중하지도 않은 나의 딴짓들, 또박또박하지 않은 빠른 말투. 나의 객관적인 삶의 행동보다 때론 나만이 알고 있는 생활 속의 잡버릇들을 알고 있는 이와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꿈꾸는 홀든처럼…….

프로필 삶이 있다. 객관적 지표라고 이름 짓는 것. 개인이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이름, 출생, 학교, 자격, 권위, 직위, 학위, 명예 들이 그것이다. 공동체 혹은 집단 속에서 객관적 지표는 서로의 아이덴터티(정체)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집단 안에서 새로운 벽과 계급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런 객관적 지표 덕분에(?) 우리는 닮은 인생, 반복되는 삶,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상생활 속에 산다. 그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삶에 내가 갈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유승훈 프란치스코 형제는 공동체적 삶도 소중히 여기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삶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때론 사람들이 쫓는 그런 객관적 지표를 과감히 버리는 사람이다. 늘 산속에서 공연하는 꿈을 꾸는 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일들을.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구절과 함께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그 녀석은 비키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은 거의 기억이 없다. 인마, 너는 하고 싶으면 어떤 여자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 여자가 킹을 모조리 뒷줄에 늘어놓는다는 사실 같은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놈이 바로 너야, 하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는 것은 바보천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녀석은 바보천치라고 하면 화를 냈다. 바보천치들이란 하나같이 남들에게 바보천치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법이다.'(J.D.샐리저 지음. <호밀밭의 파수꾼> 소담출판사 P65)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글 U. 샤퍼, 곡 김종성, 노래 유승훈, 나무와 숲
:노래 삽입 –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아무도
그대가 준 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아닌 누구에게서도
그토록 나 자신을
깊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승훈 프란치스코
 
-하드락 밴드 정적(靜寂), 무(無) 활동
-1992년 신상옥과 형제들 창단 멤버
-수원가톨릭신학교 갓등중창단 앨범, 서울가톨릭신학교 낙산중창단 앨범 프로듀서
-前 평화방송 사노찬노 진행
-현정수 신부와 이노주사 앨범, 김태진 신부, 김종성 신부, 김성훈 신부와 나무와 숲, 장환진 사도요한, PBC 창작생활성가제 앨범과 연주, 신상옥과 형제들 외 다수 앨범 프로듀서
-2001년 가톨릭문화기획사 ‘띠앗누리’ 설립 (이형진, 권성일과 함께)
-現 무(無)필 스튜디오 운영
-연락처: moosh67@naver.com, 010-7720-6222

신상훈
현재 한국가톨릭문화원 음악팀장으로 활동. 서강대 철학과 졸업. SBS 효과실 음악감독(1998~98년). '신상옥과 형제들' 창단멤버(드럼, 1992년). 연극 및 무용극 음악작곡. 2011년 안중근 기념 연극작품 <그대의 봄> 음악감독 및 작곡. 무용극 <그대 흘러라 기쁨의 강물이 되라> 음악조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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