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신학연대센터 피터 판 신부 초청 열린토론회 열어

지난 10월 1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지금여기, 구원은 어떻게?’라는 주제로 특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날 토론은 피터 판 신부와 천주교의 정양모 신부, 개신교의 이현주 목사, 불교의 도법 스님이 이야기 손님으로 참석하고 길희성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우리신학연구소 부설 아시아신학연대센터(CATS)에서 초대한 피터 판 신부는 베트남 출신 신학자로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가톨릭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고, 현재 미국의 조지타운 대학교 신학부 석좌교수로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종교간 대화와 토착화의 문제를 아시아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예수는 여러 구원자 가운데 하나인가?

‘종교간 대화와 예수 그리스도가 보편적이고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에 관하여’ 발제를 맡은 피터 판 신부는 종교간 대화를 가로막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자기 종교 창시자가 유일하고 보편적인 구원자라는 확신”이라고 밝혔다. 예수밖에 구원자가 없다고 믿는 이들 배타적 그리스도인들은 개종시키는 일을 의무로 여기고 있다. 한편 예수 외에 다른 구원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결국 다른 구원자들은 예수보다 못하거나 예수에게 의존한다고 믿는 게 포괄주의다. 그리고 예수는 단지 세계 역사상 수많은 구원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믿는 게 ‘종교다원주의자’다.

판신부에 따르면,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인간 지식을 역사-문화적 산물로 보거나 신을 절대신비로 본다고 한다. 그들은 월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견해에 따라, 각 종교는 신에 대한 상(像)을 갖고 있는데, 이 상을 절대시하면 ‘우상’이 된다고 본다. 야기 세이치의 말마따나,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부활한 예수’나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는 우리보다 더 철저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한편 아시아신학자인 피어리스는 유일성과 보편성에 관한 주장은 신앙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실천이라고 본다. 즉, 폴 니터처럼 가난한 이들의 해방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니카의 경우엔 종교간 대화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신앙에 관하여 일시적으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판신부는 판단중지가 종교현상 연구에는 괜찮지만 종교간 대화에는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깊은 종교적 믿음을 유보한 채 이루어지는 대화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 대한 공허한 수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판신부는 예수가 유일하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교가 유일하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고 본다. 그래서 포도나무와 가지들처럼 예수와 교회 역시 밀접하게 얽혀있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이런 구분이 모호해지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드러내는 ‘성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고 경배하지, 그리스도교를 믿거나 숭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판신부는 포괄주의적 입장에서 자기 종교전통을 충분히 확신하는 가운데 다른 종교전통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영적 유산과 사회적 기여에서 더욱 풍요로와질 수 있다고 본다.

예수는 하느님을 독특하게 체현하신 분

패널로 참가한 정양모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에 따라 종교간의 대화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 도 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 타고난 도사로 보면 비교적 대화가 쉬울 것이나, 예수를 신으로 내세우게 되면 아무래도 타종교 창시자들보다는 여러 수 위라는 말이 되어서 종교간 대화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정신부는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보는 신조를 버린 지가 오래”라고 밝혔다.

정신부는 사람이란 인류의 위대한 현자에 대해서 자꾸 존칭을 붙이기 마련인데, 예수 역시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그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흘러넘쳐서 유대와 헬레니즘 세계에 있던 극존칭을 모두 드렸고, 마침내 100년 경에 요한계 문헌을 쓴 사람들이 ‘예수는 하느님이다’라는 존칭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은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다만 요한 복음서 1장 로고스 찬가와 토마스의 입에 담아놓은 요한복음 20장 28절 신앙고백문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325년 니케아에서 지중해 주교 350명이 예수가 하느님이냐 사람이냐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하느님이냐 라고 논쟁하다가 2명만 빼고 모두 ‘예수는 하느님이다’라고 정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여기에 이의를 단 사람은 유배를 보내버렸다”고 한다. 정신부는 그후 교회에서 한 번 예수에게 극존칭을 주고는 후퇴를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양모 신부는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진술은 로고스 찬가라는 노래 안에 들어있는 “시적인 언어”이며, 사랑고백 같은 “고백언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하면 과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이라기보다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신 분이라 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결국 버려야 할 뗏목

한편 도법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는 가장 보편적인 가르침”이며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누구나가 알아야 할 실천해야 할 내용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이 되든 불교인이 되든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진보든 보수든,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이고 위대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이라서 종교에는 어떤 벽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초기불교에서는 인격화된 개념이 별로 없지만, 후기에 대승불교의 화엄경처럼 인격화된 개념을 사용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즉 초기에는 진리 법이라고 표현하던 것이 나중에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이게 말만 보면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감기에는 감기약이 설사에는 설사약이 더 좋듯이, 어느 하나만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만약 걸림돌이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버리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즉, “종교도 강을 건너는 나룻배와 같아서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개신교 신자에서 사람이 되기까지

이현주 목사는 “내가 개신교 신자라고 하면 신부님과 다른 종교니까 대화를 해야 하지만,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같은 편이니까 대화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나한테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떨어져서 그냥 ‘교인’이라고 한다면 같은 종교인이라서 도법스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고 말하면서, 모두가 다른 게 없이 한 식구이며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것이라 한다. “어쩌다가 ‘교인’이라는 말도 떨어지고 ‘사람’만 남으면 제가 가는 마지막 길”이며, 각자 자기 종교에 충실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성심껏 따른다면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아주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가?“ 물었다.

피터 판 신부는 패널들과 토론회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을 지켜본 뒤에 “그리스도 없이도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사실 자체를 보라”고 주문하였다.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성스럽고 거룩한 불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불교라는 교리에 대해 말하지 말고 불자들을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판신부는 베트남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자주 갔었는데,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불전함에다 보시를 하는 어머니에게 “ 어머니,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많이 하셔도 돈은 교회에다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더니, 어머니 말씀이 “부처님은 상당히 거룩하신 분”이라고 하셨단다. 판신부는 “물론 부처님이 예수님을 알 리가 없죠. 그렇지만 내가 아는 것은 부처님은 그리스도를 모르고서도 참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한상봉 200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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