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11]

평화를 위한 갈망과 행동

“오늘의 세상은 여러 형태로 분열되어 있는데,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정신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분열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영적 안식, 치유, 통합, 존엄성, 조화, 평화 등과 같은 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바티칸리포트 3)

오늘날 세상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뒤로, 세상은 악의 축과 이에 대항하는 선한 십자군으로 나뉘어서 투쟁하는 전쟁터로 변했다. 미국이 선봉장이 되어 치르는 전쟁에서 황희 정승과 같은 태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네편 내편을 가르고, 나는 좋은 분, 너는 나쁜 놈이라고 규정하는 잣대가 임의적이고 미국처럼 힘센 놈 맘대로라는 점에서 현대세계는 유치하고 야만적인 흐름 속에 있다. 짐짓 고상하게 합리적 이성과 화해를 청하던 사람들은 일종의 무력감에 휩싸여 있는 게 사실이다. 지금도 지구촌은 작고 큰 분쟁 중이다.

서정홍 시인이 ‘차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넉넉한 사람들은 죽기가 두려워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은 살기가 두려워 기도한다”고 하였다. 미국민들처럼 배부른 백성들은 자칫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목숨마저 미련 없이 던지는 이슬람 전사들은 자신의 죽음을 ‘순교’로 삼는다. 쌍방은 기득권과 생존권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박해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화해와 공존을 바라기보다 내심 ‘박멸’을 다짐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정신분열증을 치유하기에 사실상 뉴에이지 운동은 상당히 무력하다. 그들은 분열적 자아에 영적 안식을 제공하고, 상처입은 인류를 치유하고 통합시키고 세상과 인간의 평화를 위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고 바티칸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충만을 위해 에너지를 너무 집중하는 나머지, 갈라진 세계를 통합시키기 위한 평화운동에 실제적으로는 나서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나서서 정복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점수를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이 집총거부를 통하여 전쟁을 거부하지만 독재정권에 저항하지 않으며, 대부분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이지만 민중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천주교회의 경우에, 독재정권이 완강하던 1970-80년대에 비록 교회의 일부분이었지만,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교회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였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물론 지금이야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교회가 타고 넘으며, 교회 내 문제에 부심하거나 교회성장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 해방의 기억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험악한 세상에서 가난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길은, 그들과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그 길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하면서 치유될 것은 치유되고, 성취되어야 할 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평화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투쟁 속에서 기도하는 것은 더 절절하고, 절절한 기도가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

“오늘날에는 지역교회 또는 지역문화 차원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토착화의 열기가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가톨릭과 같이 세계적인 보편 교회의 성격을 지닌 거대한 종교 조직체는 이런 욕구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뉴에이지 운동은 이런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 주고 있다.(바티칸리포트 4)”

이어 바티칸리포트에서는 뉴에이지 운동이 마치 문화적 정체성을 요구하는 토착화의 열기를 ‘손쉽게’ 해결해주고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했던 뉴에이지 그룹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이를테면 뉴에이지 그룹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신자뿐 아니라 요가를 비롯한 마음공부, 몸공부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자리에 모이곤 한다. 예전에 어느 절에서 단군제를 지낸다고 하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큰 고목나무 밑에서 마당은 스님이 마련하고, 제례는 유가(儒家)에서 인도하고, 축사는 목사님이 하고, 풍물을 치며 한바탕 놀다가, 무당이 와서 굿을 하는 것으로 맺었다. 그리고 이 집회의 성격을 ‘단군제’라 하였고, 유명한 그리스-로마신화 전문가가 와서 단군제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종교화합의 장(場)이 아니라, 만신전(萬神殿)을 중심으로 한번 놀아보자는 것이고, 여기서 ‘문화적 정체성’을 논하기는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1) 다양한 종파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고 문화적 정체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2) 단군신앙과 같은 토착종교의 문화가 지배적인 분위기를 장악한다고 해서 문화적 정체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토착화가 단순히 전통종교문화의 유입/융합이라는 형식적 측면에서 이야기될 때, 종교-신앙의 본질적 측면이 경박하게 다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른 떡을 맛보려다 제 떡을 물에 빠뜨려 버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제 떡맛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그 떡이 정말 맛있는 것이라면 경박하게 남의 떡을 훔쳐보지 않는다. 제 떡에 대한 자신감이 있을 때, 제 떡을 나눠줄 마음이 생기고 남의 떡도 맛볼 엄두를 낸다. 제 떡맛을 잊지 않으면서도 남이 가진 다양한 입맛을 경험할 때 우리 의식의 지평은 넓어진다. 우리 식문화는 더 풍요로워지고, 상대방과 아울러 식문화의 발전을 도모한다.

앞서 예로 든 경우는, 사실상 그들이 제 종교의 떡맛(진리성)을 제대로 알고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인지 먼저 묻고 싶다. 이 종교 아니면 저 종교, 이 종교든 저 종교든 상관없다는 식의 신앙/믿음/신념체계는 진리에 대한 열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호색가들의 호기심에서 나왔을 공산이 크다.

한편 바티칸리포트에서 언급한 ‘가톨릭과 같이 세계적인 보편 교회의 성격을 지닌 거대한 종교 조직체’는 그 거창한 세계-보편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리성을 스스로 의심하는 자들이 장상으로 있는 종교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자기 종교에 대한 진리성을 확신할 수 없기에, 타종교와 교접함으로써 자신의 불신앙이 ‘객관적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개방사회에서는 이른바 사교(邪敎)일수록 비밀스럽게 자신들만의 폐쇄된 세계를 즐긴다. 아메리카-유럽인들이 알지 못하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심성이 가진 흡인력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토착화 또는 문화적 정체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기 신앙에 대한 복음적 확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여기서 믿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물어야 한다. 그 뒤라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종교문화적 세계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복음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새것도 없고 묵은 것도 없다. 전통종교라 해서 우러러볼 필요도 없고, 신흥종교라 해서 경원시할 필요도 없다. 그 안에 깃든 복음적 진실을 가릴만한 안목이 내 안에 머물러 있다면 말이다.

마무리하자면, 뉴에이지 운동은 대체로 ‘우주심의 발견’이라는 자못 원대하고 포괄적인 이상에 초점을 두고 다양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그 자체로 토착화나 문화적 정체성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며, 가톨릭이 토착화나 문화적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취약한 이유는 거대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소유한 진리를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깨달은 자는 예수처럼 자유롭다. 부처처럼 장애가 없다. 자신 안에서 충분하고 자기 밖에서 충만하다.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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