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박카스!”
월요일 아침은 그가 약국에 뜨는 날이다. 들어서자마자 당당하게 박카스를 요구한다. 마치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손님들이 재빨리 그를 피해 길을 내준다. 박카스 한병을 나꿔채고 냅다 튄다.

그는 여의도역 5번 출구밖 금융투자협회 빌딩 모퉁이에 산다. 엉켜진 머리카락 무성한 턱수염 구멍난 털모자에 검정비닐봉투로 발을 감은 노숙인이다. 바닥에 깐 스티로폼 빈 상자가 그의 집. 웅크린 어깨에 역겨운 누더기를 걸치고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겨울 여의도에 있는 약국에 출근하는 첫날 히말라야 산맥처럼 높게 솟은 빌딩숲 쓰레기통 옆에서 막걸리와 빵으로 아침식사 중인 한 노숙인을 보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의도 여기저기서 그는 내 눈에 띄었다.

“타우린 백미리그램!” 월요일 아침 한창 바쁜 시간에 머리를 산발한 노숙인이 약국에 나타났다. “타우린 백미리그램?” 얼떨떨해 있는 사이 “박카스!” 약사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의기양양해서 소리를 지른다. 손님들은 빨리 내보내라는 눈짓을 보낸다. 급한 마음에 박카스에 자양강장제 한 알까지 덤으로 얹어 보냈다.

월요일 아침마다 그의 염치없는 행각은 쭈욱 계속되었다. 짜증이 폭발할 즈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오늘은 당하지 않겠다고 전의를 가다듬고 있는데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약 포장기가 갑자기 멈췄다. 약을 기다리는 손님들의 재촉과 불평이 터져나오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여기저기 연락해보지만 오후나 되서야 수리가 가능하단다. “내가 고쳐보꾸마!”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노숙인이었다.

48살의 노숙인 차씨는 전문대를 졸었했다. 실력있는 전기 기사 였다. 1997년까지 대구에서 전자회사의 과장이었지만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구조조정으로 잘렸다. 퇴직금으로 시내에 작은 전기제품 수리가게를 냈지만 불경기라 거덜이 났다. 빚이 수천만원이었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악성 뇌종양에 걸렸다. 아내를 치료하려고 대출을 받고, 24평짜리 아파트를 팔고, 4식구가 반지하 셋방으로 옮겼다. 결국 아내는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남은 것은 1억에 가까운 빚이었다.

부지런하고 낙천적이고 마음씀씀이가 옹색하지 않은 그도 믿고 의지하던 팔순 노모마저 쓰러지자 바뀌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었다. 곧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초등학생 아이들을 시설에 떼어놓고 돌아오는 날 그는 특유의 유머와 농담대신에 ‘비관’이라는 두 글자만 가슴에 심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인 아이들 생각에 전신주의 스티커 떼기, 재활용 쓰레기 수거, 대리운전기사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의 몸이 고장나는 줄도 몰랐다. 과로로 쓰러지면서 당뇨성 신 부전이 왔다.

‘그놈의 술’이 원수였다. 차씨로서는 암담한 처지를 잊는 손 쉬운 방법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눈 앞이 캄캄해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지만 술은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다. 목숨을 끊는 대신 그렇게 술은 점점 그의 마음을 갉아먹었고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블랙홀로 그를 데려갔다. 어느덧 그는 쪽방과 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인이 되었다.

“내사 이런건 식은 죽 먹기데이!” 드라이버 하나로 약 포장기를 뚝딱 고쳐 놓은 차씨. 땀을 닦으며 씨익 웃는다. 박카스를 구걸하던 뻔뻔한 얼굴이 아니다. 이 위기에서 구해준 구세주 차씨에게 무엇인들 아까우랴! 약국 직원이 수고비 삼만 원을 내밀자 차씨는 점잖게 거절이다. "박카스나 한병 주소! 그동안 외상으로 먹은 거 다 제하소!"

월요일 아침마다 차씨를 박카스 도둑이라고 욕했다. ‘정직’과 ‘성실’의 잣대로 구박했다. 이제서야 깨닫는 것이 있었으니 내가 알면 얼마나 아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속고 속이는 것 아닌가. 차씨같은 노숙인들만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 하는가? 반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안하는가? 도둑질도 안하는가? 그깟 오백 원짜리 박카스 한 병에 뭐 그리 분해하는가. 사람들은 왜 작은 거짓에는 분노하고 큰 거짓에는 관대한 것일까? 4100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로 피로를 달래는 말쑥한 저 금융맨들의 피로회복제에 비하면 차씨의 500원짜리 드링크는 너무 작은 것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은 이런 한마디를 남겼다.“가난한 사람들도 즐거운 여가를 가질수 있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게 큰 충격이다.” 오늘도 여의도 어딘가에서 무위도식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하고 긴장되고 피곤한 차씨에게 여의도의 약사가 피로회복제 한 병을 권한다. “ 피로회복제는 약국에 있습니다.” 모 제약회사의 광고문구처럼.

심명희/ 마리아.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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