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태>반포 120주년 기념 세미나 토론-강인철 교수

박동호 신부는 「새로운 사태」의 ‘의의’를 가리켜 “사회교리를 형성한 교황의 회칙들 가운데 첫 회칙으로서 시대의 주요 문제에 교회가 계속적으로 대응하는 전통을 시작했다.”고 요약했다. 간명하지만 지극히 명쾌한 규정이다.

일찍이 교황 비오 11세는 「사십주년」에서 「새로운 사태」를 향해 “사회문제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교적 활동의 궁극적 기반이 되는 대헌장”(16항)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여기서 인용되는 교회 문헌들은 모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편, <교회와 사회: 사회교리에 관한 교회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에 따랐다.)

요한 23세 역시 「어머니요 스승」에서 「새로운 사태」는 “가톨릭교회가 모든 시대에 걸쳐 가르쳐온 사회교리와 사회활동에 관한 가장 빛나는 문헌”이며(7항), “그 주장의 무게와 그 넓이와 그 호소력에서, 레오 13세의 이 회칙에 필적할 만한 가르침은 거의 없다.…그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활동에는 더욱 폭넓은 지평이 열렸다. 그 최고의 목자는 비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탄식과 갈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최우선적으로 그들의 권리 추구와 회복에 헌신하였다”(8항)고 말했다.

「새로운 사태」는 교회 안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성찰되는 가톨릭 텍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1891년에 레오 13세가 이 회칙을 반포한 이후, 40주년이 되는 1931년에 비오 11세가 「사십주년」을, 70주년이 되는 1961년에는 요한 23세가 「어머니요 스승」을 반포했다. 이후에는 매 10년마다 「새로운 사태」를 기념하는 회칙이 반포되었다. 1971년의 「팔십주년」(바오로 6세)에 이어, 90주년인 1981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노동하는 인간」을 반포했는데, 이 회칙의 부제는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인간 노동에 관하여”였다. 그리고 1991년 다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백주년」이 반포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2항)에서 「새로운 사태」 이후 이루어진 성찰을 기초로, 노동 문제에 대한 교회의 접근에서 두 시기를 구분한 바 있다. 첫째, 「새로운 사태」(1891년)부터 「사십주년」(1931년)까지 “이 시기의 교회의 가르침은 ‘노동자 문제’를 각 국가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둘째, 「어머니요 스승」(1961년) 이후에는 “그 지평을 넓혀 ‘노동자 문제’가 전 세계 안에서 다루어지도록 한 것”이 특징지었다. 노동문제에 대한 ‘일국적’ 시각에서 ‘국제적·세계적’ 시각으로 안목을 넓혀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올해는 교회가 후진국의 ‘개발’(development)이나 지구적 수준에서의 부의 편중으로 대표되는 ‘남북(南北) 문제’ 등의 맥락에서 ‘노동문제의 국제적 측면’에 주목하고 이를 자신의 숙제 중 하나로 삼은 지 꼭 5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새로운 사태> 120주년을 맞는 한국 교회와 사회의 컨텍스트에서 이 회칙을 다시 읽고 다시 해석한 글이 박동호 신부에 의해 나온 셈이다. 박동호 신부는 먼저 「새로운 사태」가 등장하게 되는 사회적, 교회적 배경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해석학적 텍스트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이런 태도의 자연스런 귀결로서, 논문의 후반부는 ‘오늘 우리 현실의 컨텍스트에서의 텍스트 읽기’로 채워져 있다. 구체적으로, 박 신부는 “우리 사회와 교회가 성찰할 몇 가지 과제”로서, (1) 사회주의, (2) 계급, (3) 정당한 임금, (4) 국가의 적법한 역할, (5) 노동자와 사용주 사이의 관계(협동조합주의)의 다섯 가지를 꼽았다.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고, 또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 쟁점들이다.

한국교회에 의한 「새로운 사태」 독해(讀解)의 역사

박 신부의 다섯 가지 쟁점을 하나하나 논한다는 것은 토론자가 가진 능력과 시간 모두를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이런 문제제기를 염두에 두면서, 토론자는 「새로운 사태」가 한국교회에 의해 해석되어온 과정을 ‘역사적’ 측면에 주목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 회칙에 담긴 자본주의 비판(반자본주의적) 담론과 사회주의 비판(반사회주의) 담론을 편의상 구별할 때, 우리는 두 개의 대조적인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1920년대부터 1950연대까지 사회주의 비판(반사회주의) 담론이 우세한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 비판 담론(사회주의혁명 예방을 위한 자본주의 개혁 담론)이 우세한 시기였다.

첫째,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새로운 사태」에 대한 반공주의적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한국교회에서 「새로운 사태」가 일부나마 처음 소개된 것은 󰡔경향잡지󰡕 1925년 12월호부터 이듬해까지 무려 7회에 걸쳐 연재된 공산주의 비판 기사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사태」 등 여러 문헌이 등장하지만, 사유재산권에 대한 일방적 옹호, 착취 개념의 부인, 계급 존재의 정당성, 빈자(貧者)에 대한 시혜자로서의 부자(富者) 이미지 등 교황 교서들에 대한 보수적·반공주의적인 해석이 두드러지며, 반면에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의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사십주년」이 나온 1931년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교회는 이 해에 「가톨릭액션」을 중심으로 사회참여 노선으로 전환을 시도했고, 이후 교회잡지들을 통해 비교적 자주 교황 문헌들이 소개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37년에 발표된 비오 11세의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는 「새로운 사태」에 대한 기존의 반공주의적 해석을 더욱 강화하는 영향을 발휘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1930∼1950년대의 한국 가톨릭 지식인들은 「하느님이신 구세주」를 통해 「새로운 사태」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구세주」는 부제가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하여”였고,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 회칙의 명칭이 아예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으로 통용되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에서 공산주의는 사상 최악의 박해자로 묘사되며, “인간사회의 골수에까지 침투하여 그 파멸만을 가져오는 치명적 전염병”, “오류와 궤변으로 가득 찬 체제”, “어둠의 자식들”, “어둠의 세력”, “치명적 원수”, “사탄의 논리를 갖춘 괴물” 등 극도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호명된다. (비오 11세,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교육분과 번역,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 가톨릭출판사, 1981, 10, 12, 19, 38, 61, 65쪽)

해방 후의 격렬한 좌우대립, 전쟁, 분단과 냉전체제의 분위기 속에서 이런 상황은 더욱 굳어졌다. 그런데 해방 후인 1948년에 비로소 이해남에 의해 「새로운 사태」와 「사십주년」이 처음 번역되어 <사회질서의 대헌장>(경향신문사)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한국인 신자들이 직접 한글로 된 회칙을 비로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전쟁 말기, 특히 1952∼1953년에는 「가톨릭시보」 지면을 통해 「새로운 사태」의 ‘자본주의 비판 담론’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개혁을 통한 공산주의혁명 방어’, 그람시의 표현에 의하면 ‘수동혁명’을 주장하는 논조였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에서조차 (히틀러가 자본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했던 것과 유사하게) 이따금씩 반자본주의 담론이 파시즘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위험스럽게 결합되었다.

둘째, 1960년대 이후에는 정반대로 「새로운 사태」 해석에서 ‘자본주의 비판 담론’이 두드러진 반면, ‘사회주의 비판 담론’은 최소화되었다.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는 회칙, 즉 「노동헌장」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한국에서도 1959년 이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운동이 시작되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비판 담론’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반공주의는 ‘당연시되었다.’ 1950년대 초에 등장했던, ‘자본주의의 개혁을 통한 공산주의혁명 방어’라는 논리의 연장이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연루된 강화도 심도직물에서의 노사분규와 관련하여 한국 주교단이 1968년 2월 9일 발표한 성명서가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주교들은 “국토가 양단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승공의 목표를 향하여 경제부흥을 서두르고 있는 이때에 노사문제의 원만한 해결은 최후 승리를 위한 첩경”이고, “노동력의 착취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의 초점이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므로 이를 막기 위한 노동조합의 기능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는 이 나라의 힘이요, 자랑이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정당한 휴식이 국가경제 부흥의 첩경이며 승공의 유일한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경향잡지>, 1968년 3월호, 4-5쪽)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은 한국 천주교 전체가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 직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었고, 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특히 「사목헌장」(1965년)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따라서 1930∼1950년대의 한국 가톨릭 지식인들은 「하느님이신 구세주」를 통해 「새로운 사태」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처럼, 1970∼1980년대의 한국 가톨릭 지식인들은 「사목헌장」을 통해 「새로운 사태」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목헌장」은 「새로운 사태」를 단 2회만 인용했을 뿐이다. 한 번은 노동의 품위, 의무, 권리, 기회, 보수 등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고(67항; 또 70항에서는 기업 운영 및 경제·노동 정책 결정에 참여할 권리,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 파업의 권리를 언급하고 있다), 다른 한 번은 사유재산권을 긍정하는 맥락에서 재화의 소유와 이용에 관해 말할 때이다(71항).

「새로운 사태」에서부터 교회는 사유재산권의 ‘개인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을 처음부터 균형 있게 강조했고, 「사십주년」과 「어머니요 스승」을 거치면서 ‘사회적’ 성격에 대해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새로운 사태」 이후 이 텍스트에 대한 후임 교황들의 재해석은 ① 소유의 “사회적 성격”, ② 재화의 (소유만이 아니라) 정의로운 “이용”의 중요성, 혹은 “재화의 공동 목적성”에 대한 강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사목헌장」은 “재화의 공동 목적성”, “재화의 보편적 목적성”, “만인을 위한 현세 재화”의 측면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69항, 71항). 더욱이 「사목헌장」은 재화 소유(‘소유의 사회적 성격’)와 재화 이용(‘재화의 공동 목적성’)의 관계를 더 없이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재화의 공동 목적성’이 ‘소유의 사회적 성격’의 바탕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유재산 자체는 본질상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사회적 성격은 재화의 공동 목적 법칙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이를 무시하면 재산 소유는 가끔 탐욕과 중대한 혼란의 계기가 되며 소유권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공박자들에게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사목헌장, 71항)

100년 후 다시 맞는 21세기의 ‘새로운 사태’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전후하여 세계사와 한국사 모두에서 거대한 전환기가 닥쳤다. 최근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비교적 중장기적인 정치·경제 동학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레짐(regime, 체제)’ 개념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 김호기 교수에 의하면, “체제(regime)란 포괄적으로 경제와 정치의 조응관계를 의미하며, 이때 특히 물적 기반으로서의 생산체제 또는 축적체제가 중요하다.” (김호기, “87년 체제인가, 97년 체제인가: 민주화 시대에서 세계화 시대로”, <사회비평>, 제36호, 2007년 여름, 16쪽)

세계사적으로 보면, ‘89년 체제’라는 표현이 가능할 듯도 하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1989년은 “맑스주의의 총체적이고, 급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붕괴”라는 측면에서 “경이의 해(annus mirabilis)”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9년 시작된 거대한 격변은 1991년 구 소련의 해체로 마감되었고, 1991년은 바로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백주년>이 반포되었다.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와 냉전체제의 종언은 시장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적 승리로 해석되었다. 또한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국가보안법 체제’인 ‘48년 체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87년 체제’ 혹은 ‘97년 체제’ 이론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두 논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1987년의 6월항쟁과 민주화 이행 조치들에 의해 시작된 ‘87년 체제’ 혹은 ‘민주화 이후 체제’에 대해, 김종엽 교수는 “보수적 경제구조와 개혁적 정치구조 사이의 ‘정체적 평형 혹은 교착 상태’”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87년 체제는 “정치적인 수준에서는 민주화가 난항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진전되어 왔지만, 경제적으로는 답보와 정체, 그리고 보수적 헤게모니의 확립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권위주의적 산업화 세력이 장악한 보수적 경제구조와 민주화 세력이 영향력을 유지한 개혁적 정치구조 사이에 ‘정체적 평형’이 형성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김종엽, “민주화 이후 사회체제의 변화와 공공성”, 󰡔공공성과 민주주의󰡕(민주사회정책연구원 개원 6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민주사회정책연구원, 2006.11.10, 4쪽.
김호기 교수는 87년 체제가 이룩한 ‘역사적 성취’와 특징을, (1) ‘예외국가’에서 ‘정상국가’로 전환, (2) 사회운동이 이슈들을 먼저 제기하고 정치사회가 이를 수용하는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 (3) 김영삼 정부에서의 군부개입 차단, 김대중 정부에서의 수평적 정권교체, 노무현 정부에서의 권력기관의 민주화 등 ‘절차적 민주화’가 서서히 달성되어 온 점을 들었다. (김호기, “87년 체제인가, 97년 체제인가”, 15쪽. 예외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조희연,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아르케, 2004)

이런 역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87년 체제’는 여러 한계 또한 드러냈다. ‘3김 정치’로 대표되는 지역주의정치, 지역당 구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최장집은 87년 체제를 1987년 대선과 1988년 4월 총선을 통해 등장한 ‘지역당 구조/지역당 체제’로 규정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1950년대에 형성된 정당체제와 구조적 차이를 갖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의하면, “지역당 체제는, 두 대표적 생산자집단인 노동자, 농민들이 정당으로 조직되거나 대표되지 못한 구체제의 변형”이라는 것이다(최장집, “정치적 민주화: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비평>, 제14호, 2007년 봄, 15쪽). 손호철은 이를 “87년 체제의 찌꺼기들”이라고 부르면서, “87년 체제의 핵심 중 하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정당민주주의의 후퇴, 곧 3김 정치다. 그리고 3김 정치 중 제왕적 대통령과 사당(私黨)체제는 노무현 정부에 의해 상당히 극복됐고, 남은 문제는 지역주의다”라고 주장했다(손호철, <해방 60년의 한국정치>, 12-13쪽).

김호기는 87년 체제의 한계로서, (1)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체, 즉 민주화는 이행 단계를 지나 공고화 단계로 이어져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정치적 민주화에서 사회․경제적 민주화로의 전환이 더딘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 (2) 게다가 그 방향도 ‘국가 주도’에서 ‘국가와 시장의 균형’이 아니라 ‘시장 주도’로 전환되었으며, 그 결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사회적 양극화가 강화되어 왔다는 것, (3) 사회갈등의 분출, 즉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군부 권위주의 하에서 억압되어 온 사회갈등이 분출하고 사회균열이 다원화되어 왔다는 점 등을 들었다. (김호기, “87년 체제인가, 97년 체제인가”, 15-16쪽.)

김종엽이 “보수적 경제구조와 개혁적 정치구조 사이의 긴장과 갈등”에 주목한 것처럼, 박상훈도 ‘민주주의의 분배 효과’와 ‘시장의 권력 효과’ 사이, 혹은 ‘민주화 이후 체제’와 ‘시장 우위 체제’ 사이의 긴장·갈등에 주목했다. 그는 1990년대의 변화를 “시장권력에의 굴복”, 즉 “민주화의 효과가 시장권력에 의해 약화되면서 한국사회가 빠르게 계급으로 분절된 사회로 전환된 것”으로 요약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체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민주주의 확대를 지향하는 힘과 현상유지 혹은 시장 체제로의 전환을 선호하는 힘 사이의 갈등이 짧은 기간 만에 전자 우위에서 후자 우위의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데 있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충격은 매우 강력해서 노태우 정부 시기에도 강한 분배 효과를 낳았지만, 1990년대 초반을 경유하면서 점차 축소되고 그 자리를 시장의 권력 효과가 대체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시장 우위 체제로 전환되었고 민주주의가 갖는 분배효과는 역전되었다.” (박상훈, “1단계 민주화의 종결”,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제11호, 2007년 상반기, 139, 146쪽)

이런 전환 과정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완결되었다. “IMF 외환위기는 소위 ‘87년 체제’와 단절되는 새로운 질을 가진 체제, 즉 ‘97년 체제’를 형성시켰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김정훈, “민주화 20년의 한국 사회: 기로에 선 한국 민주주의”, 󰡔경제와 사회󰡕, 제74호, 2007년 여름호, 35쪽) 결국 ‘신자유주의의 한국판’이 IMF 외환위기 이후 시기인 이른바 ‘97년 체제’인 것이고, 박상훈이 ‘시장 체제’ 혹은 ‘시장 우위 체제’라고 부른 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다름 아닌 ‘97년 체제’인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는 ‘민주주의’와 ‘민주화’ 자체를 재성찰하게 만들었다. 첫째, ‘정치적 민주화’가 ‘삶의 질 향상’을 초래하지 못하는 현실이 문제시되었다. 이런 고민은 위에서 지적한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체, 정치적 민주화에서 사회․경제적 민주화로의 전환이 더딘 것”, “‘민주주의의 분배 효과’가 ‘시장의 권력 효과’에 압도당하는 현실” 등과도 관련된다. 이론적으로 보면, ‘정치적 민주화’와 ‘삶의 질 향상’의 관계에 새삼 주목하면서 “민주화 이론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행론과 공고화론의 문제의식이 ‘민주주의의 정착 여부’에서 ‘민주주의의 질’에 관한 문제로 전환”되었다고 한다(김정훈, “민주화 20년의 한국 사회”, 36, 43쪽).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는 데 무능하다”는 대중의 인식이 확산될수록 절실한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더더욱 요원해질 뿐만 아니라, 이런 인식과 동반되는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은 민주주의 자체를 위기로 몰아간다. 둘째, 더 큰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기존의 특권 체제가 정당화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가 수용되고 ‘욕망의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사태이다. 박상훈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가 수용될 때의 파괴력”에 주목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비극의 기원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대면해야 할 민주주의의 허약함”이라고 주장했다. (박상훈, “1단계 민주화의 종결”, 157쪽)

또 최장집은 “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때,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언어로 기능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형성의 기제가 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구조와 특권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개정판), 후마니타스, 2005, 23쪽)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허약성과 보수성이 97년 체제로의 이행을 낳았지만, 97년 체제가 자리를 잡을수록 그것이 다시금 ‘민주주의의 위기’를 더욱 촉진하는 악순환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또 97년 체제가 단단하게 자리 잡으면서,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정치․경제 영역을 넘어 시민사회, 특히 교육과 공론장(언론)마저 시장권력과 국가권력의 수중에 다시 장악되는 ‘재봉건화’(혹은 역근대화)까지 거론될 지경에 이르렀다.

‘봉건적 질서로 되돌아감’이라는 의미의 ‘재봉건화’라는 말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공론 영역에서 국가통제 강화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말이다.…최근 한국 교육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재봉건화’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근대 시민사회는 천부인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공적 영역에서 제도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만인에게는 교육받을 권리가 인정되었다. 차별 없는 일반교육이 근대 공교육의 원칙이 되었다.…한국에서도 근대교육체제 확립 뒤 교육은 계층이동의 통로이자 사회적 평등의 기둥이 되었다.…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제도교육의 상당부분이 시장에 ‘아웃소싱’되었다. 사교육 영역이 해가 갈수록 커지고, 사교육 수혜 기회는 부모의 재력에 비례하고 있다. 이제는 대학교육도 점점 더 ‘아웃소싱’되고 있다.…교육을 위한 공적 지원은 폐지되거나 그 비중이 삭감되고, 그 자리에 기업이 들어서고 있다.…신자유주의 아래서 기업은 봉건영주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거니와, 교육의 장에서도 새로운 봉건영주들을 향한 복종이 강화되고 있다. (한정숙, “신자유주의와 교육의 ‘재봉건화’”, 한겨레, 2011.4.23)

근대국가 개념이 들어서면서 능력, 즉 공적 경쟁을 통해서 출신이나 가문 등의 신분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화 100년만에 ‘역근대화’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국가가 공교육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냐, 부모가 강남에 사느냐 아니냐에 아이들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신분 세습 사회로 역근대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명림 교수의 말임. 오마이뉴스, 2009.12.8)

위르겐 하버마스는 1962년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여론 형성 공간으로서의 ‘공론장’ 개념을 제시했다.…하버마스는 초기 신문이 합리적 공론장 구실을 한 반면에, 현대 대중매체가 상업화와 국가권력 개입 등의 요인 때문에 본연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제기했다.…그는 이를 봉건시대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재봉건화’라고 불렀다. 지방 방문에 나선 대통령한테 지방 방송사 사장의 직분과 동떨어진 지역 현안 업무보고를 할 정도로 친정부 색채가 짙은 인사가 엊그제 <문화방송>의 새 사장으로 임명됐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권의 개입을 줄이고 방송의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만들었던 방송문화진흥회의 취지는 무력화됐다. 하버마스의 개념을 빌리면, 문화방송은 국가권력이 좌지우지하는 봉건의 시대로 되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박창식, “MBC의 ‘재봉건화’”, 한겨레, 2010.2.29)

그나마 불완전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교육․언론 영역의 강고한 봉건주의와 결합된 상황이 97년 체제의 현주소인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경제적 봉건주의를 용감하게 공격했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정치권력-사법권력-언론권력까지 장악한 시장권력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교육 영역에서의 극심한 불평등이 노동시장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표현 그리고 파견직 청소노동자 파업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불리한 임금 문제와 불리한 고용 문제는 서로 얽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임오프제(근로시간면제제도), 소수 노조의 교섭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단체협약 해지권 남용, 사실상 자본에 투항한 새로운 상급노동단체의 결성 움직임 등으로 기존 노동조합을 약화시키려는 전방위적 공세가 계속되고, 폭력적인 진압과 손배가압류 조치를 통한 단체행동권․파업권의 심각한 위협 등 노동운동은 위기에 처해 있다. 공무원노조와 교수노조의 경우에서 보듯이,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 자체가 제한되기도 한다.

현재와 미래의 노동자들에게는 암울하기만 한 상황이다. 반면에 자본과 권력에게는 이런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울 것이다. 양대(兩大) 계급으로의 분열, 계급 간의 사회경제적 양극화라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한 120년 전에도 그랬다. 비오 11세에 의하면, “이와 같은 사태를 부유한 자들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그 사태를 경제 법칙의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로 봄으로써 그 불행한 이들을 구제하는 모든 배려를 자선에만 맡겨놓았다. 그들은 입법자들에 의해서 묵인되거나 때로는 허가된 공공연한 정의의 침해를 개선하는 것이 마치 자선의 과제인 듯이 여겼던 것이다”(「40주년」, 2항). “입법자들에 의해서 묵인되거나 때로는 허가된 공공연한 정의의 침해”는 지금도 거침없이 횡행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지금도 극단적인 불평등과 차별을 “경제 법칙의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라고 강변한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사태」 반포된 지 약 100년 후 세계와 한국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비판 담론의 측면에 더 집중하여 「새로운 사태」를 읽도록 요구한다. 비오 11세 교황은 레오 13세에 의해 “악(惡)”으로 단죄된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탐욕”(「새로운 사태」, 1항)을 다시 인용하면서, 자본주의의 철학인 “자유주의”의 무능함을 비판했다. “그(레오 13세—인용자)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편으로부터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사회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찾는 데 있어서 이미 전적으로 무능함을 보여주었”다고 했다(「40주년」, 3항). 여기서 비오 11세가 언급한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도 충돌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가리킬 것이고,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 (Libertarianism)와도 유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시장만능주의, 시장숭배(시장의 우상화)까지 나아간 것이 최근의 신자유주의일 것이다.

자본주의 비판 담론의 측면에 더 집중하여 「새로운 사태」를 읽을 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종교적’ 측면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며, 종교(인들)마저 물신주의나 ‘시장의 종교’에 감염되는 사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데이빗 로이에 의하면, 현재의 시장자본주의는 세속적 경제체제이기보다 차라리 ‘종교’(religion)이고, 경제학은 과학을 가장한 ‘신학’(theology)이며, 시장은 이 종교의 ‘신’(god)이다. 자본주의의 ‘이단’(heresy)인 공산주의의 붕괴는 ‘시장의 종교’(the Market; religion of the market)가 최초의 진정한 ‘세계종교’(world religion)임을 더 명백하게 만들었다. (David R. Loy, “The Religion of the Market,”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65/2, Summer 1997, pp. 275, 289. 서울대 우희종 교수도 최근 「한겨레」(2011.4.27)에 기고한 “생명과 삶에 대한 예의”라는 글에서 유사한 주장을 폈다.)

21세기에는 기존 종교보다 더욱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종교와 신이 있다. 욕망의 만족을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과학을 수단으로 한 자본주의라는 종교와 이들의 물신(物神)이다. 물신이라는 우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한경쟁을 통한 자본축적을 제시한다. 복지와 공공성은 파괴되고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강자는 약자의 몫마저 당당하게 강탈한다. 이것은 우리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가득 차 있어서 결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기업이나 경제·언론·정치·교육 분야 및 종교계마저 접수한 상태다. 자연스레 이웃에 대한 배려는 없어지고 오직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기심만이 강조되어 양극화는 심화되고, 특히 이 우상은 종종 그 희생물로서 인간의 목숨을 요구한다. 최근 법인화된 국립대학인 카이스트에서의 무한경쟁으로 나타난 자살, 비정규직의 연이은 죽음들, 가난 속에 목숨을 끊는 가장들의 이야기는 넘쳐나는 성공신화와 승자의 영광을 간증 삼아 소리 없이 지워진다. 이 종교집단에서 법은 있는 자들의 행태를 정당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도 풀려나고, 서민의 거액을 떼먹은 배부른 자들은 당연히 무죄다. 심지어 하청업체와 비정규직의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진 재벌이 오히려 시대의 구세주로 등장한다. 이들은 그릇에 물이 차면 넘치게 되어 있으니 우선 그릇부터 채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물신의 그릇은 물이 차면 다시 커져서 결코 넘치지 않는다.

최근 중앙대의 신진욱 교수는 “한국 시민사회의 이중성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사회적․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공적 시민사회’와, 개인적 성공과 자산증식을 추구하는 ‘욕망의 시민사회’라는 두 모습이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고 있는 모순적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신진욱, “‘욕망의 시민사회’를 넘어서”, 프레시안, 2010.2.18.)  김종엽 교수는 “복지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문화적 연대와 공공성에 대한 가치 헌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종엽, “민주화 이후 사회체제의 변화와 공공성”, 8쪽)

교회가 한국에서 “공공적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문 중 하나이며, “사회문화적 연대와 공공성에 대한 가치 헌신”을 교육하고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는 것이 우리 사회 성원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시민운동이 급성장한 반면 가톨릭노동운동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탓이기도 하겠지만, 1990년대 이후 객관적인 필요에도 불구하고 1970∼1980년대에 비해 노동계를 지원하는 교회의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고, 노동과 경제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발언도 감소했다. 항상 그러하듯이, 문제는 노동과 경제에 대한 ‘전문성’이라기보다 ‘입장’과 ‘진정성’이다. 요한 23세가 적절히 강조했듯이, 「새로운 사태」에서 정말로 위대하고 놀라운 사실은, “최고의 목자가 비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탄식과 갈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최우선적으로 그들의 권리 추구와 회복에 헌신하였다”는 그 사실, 다시 말해 교황이 비천한 이들의 탄식에 귀 기울여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고용주들의 탐욕을 공박하면서 힘없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사실, 나아가 노동의 존엄함을 깨우쳐 노동자들을 창조사업의 조력자로 드높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편들기가 20세기를 “제국주의와 전쟁의 잔혹한 세기”만이 아니라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권 신장과 민주주의 확산의 세기”로도 만들었던 것이다. 교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발언이 ‘시장의 종교’라는 괴물과 악전고투하고 있는 이들에게 정말로 큰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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