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의 눈으로 역사적 예수 읽기-7]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교수이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이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 학문적 양심에 솔직하고, 신앙의 성숙을 향한 열정도 담겨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가 20여년만에 돌아와 지성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저작들을 통해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책 <예수 새로 보기>(원제 Jesus : A New Version, 1987)의 요지를 추리면서 오늘날 어울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간단히 정리해본 글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 속에 가득한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루카 6,45) 

성서에서 ‘마음’이란 정신, 감정, 의지보다 깊은 세계, 가장 깊은 자아를 의미한다. 그것은 지각, 생각, 감정, 행동의 근거 혹은 원천이다.(155) 인간에게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

“마음 속에 가득한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라는 예수의 위 설교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입 밖으로 나온 것”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인습적 지혜’를 전복시킨다. 인습적 지혜로는 마음 속 깊은 곳을 움직이지 못 한다. 머리로는 바른 교리를 믿는다면서도 마음에는 감동이 없을 수도 있다. 인습적 차원에서는 옳은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기적이기도 하다. 마음이 제대로 되어 있을 때에야 외적 행위도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너는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예수는 토라(율법)를 인간 행위에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적 자아에 적용했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로 가르치고 행동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마태 5,8)

깨끗한 마음이란,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 집중하는 마음’(158)이다. 무언가 계산적이지 않고, 양심이 말하는 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의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께 집중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한다”거나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한다”(마태 6,24)거나 하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예수에게 믿음은 '불안'의 반대말

물론 예수도 ‘믿음’에 대해 말하곤 했다. 이 때의 믿음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온전성 혹은 전일성을 의미한다. 마음이 전일적인 이는 한 주인만 섬긴다. 이 주인 저 주인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보는 종의 내면은 불안하다. 예수에게 믿음은 불안의 반대말이다. 사람은 이제나 저제나 신이 계시다고 믿는다면서도, 그 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면서도, 여전히 불안을 느낀다. 말로는 신을 믿는다면서 무언가 불안하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그저 아는 것, 머리로 판단하는 것 이상이다. 믿음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의 내적 전일성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상태에 이르러 있어야 하고, 또 이르게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기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도리어 꺼려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길을 간 예수의 최후가 부담스럽게도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 8,34)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는 말과 같다.

물론 이 때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습적 차원에서 안전과 정체성을 보장해주던 세상에 대한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변화의 철저성을 의미하는 은유이다.(164) 이기적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인습적 지혜 혹은 ‘넓은 길’에만 안주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요구하는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인습적 지혜와 질서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것이다. 깊은 양심의 목소리대로, 성령의 기운에 따라 사는 삶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혁은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의 핵심을 이루어왔다. 가령 바울로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갈라 2,20)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러한 죽음의 은유가 교회 전통에서 널리 공인된 이유는 예수의 역사적 삶, 그 마지막 모습 때문이었다. 예수는 죽음이라는 은유로 변혁의 길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다가 실제로 죽었다. 그의 가르침에는 세상과 문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들어있다.

안전을 추구하는 인습적 지혜전통을 넘어서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단순히 세상 도피적이거나 금욕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도 자연 세계 속에서 기쁨을 찾았다. 먹고 마시기를 탐한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죄인들과 함께 하는 잔치 분위기를 즐겼다. 전통에 대한 단순한 부정주의자도 아니었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던 성서를 인용했고, 인정했고, 율법을 지켰다. 그러면서도 인습적 지혜에 순응하면서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이들에 의해 형성된 ‘제도화한 종교’에 대해서는 도전적이었다. 제도화된 종교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라기보다는 옛 삶의 방식을 합법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67)

예수의 도전은 기존의 길을 위한 또 다른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마저 어떤 요구 조건이 된다면, 그의 도전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인습적인 지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예수의 도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요구였다.(168) 만물의 중심에서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실재에로의 초대였다고 하겠다.

인습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한편 쉬운 길이기도 하다. 인습적 지혜 전통에서 안전을 구하던 이에게는 힘든 길이지만, 인습적 진리의 체계가 부과한 짐을 과도하게 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쉬운 멍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 ( )속 숫자는 마커스 보그, <예수새로보기> 김기석 옮김(한국신학연구소, 2004)의 쪽수입니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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