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자, 빈민 통해 예수 만나...요즘 고국서 온 형제들과 즐거운 나날

1976년 2월 어느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잔뜩 품고 낯선 땅 한국에 첫발을 디딘 오기백 신부. 그런데 젊은 신부 오기백은 이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 나를 맞으러 공항에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당시의 황당함을 웃음으로 말하는 오기백 신부. 정작 한국 골롬반외방전교회에서는 오기백 신부가 탄 비행기가 저녁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한국말도 못하고, 낯선 나라 비행장에서 그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그를 군인으로 오해한 경찰은 미군 택시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다행히 기사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그가 살 집, 골롬반회의 주소도 영어로 적혀 있었다. 겨울답지 않게 날씨는 포근했고 북악스카이웨이 길을 돌아 나오는데 보이는 잔설도 젊은 오기백 신부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대표적 드라이브 코스라 할 수 있는 삼청동과 성북동 산길을 달리면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까, 집을 제대로 찾아줄까란 불안감이 없진 않았지만 무척 좋았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하얀 눈도 보이고, 날씨도 포근했지요. 그것이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었지요.”

젊은 날,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상황, 아일랜드의 젊은 신부 오기백이 선교지 한국에서 맞닥트릴 상황을 예시라도 해주듯 한국행 첫날 그의 행보는 예기치 않은 일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평안함을 느끼고 행복했다고 한다.  

▲ 오기백 신부. (사진/상인숙 기자)

1976년 한국 땅 밞아. 노동 현실에 눈 떠 노동자와 함께 한 삶

35년 전, 2월 18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비행기 트랙을 걸어내려왔던 20대 젊은 신부는 나무를 심고 가꾸듯 선교지에서 삶을 일구었고,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2011년 5월 꽃피는 봄날에 오기백 신부의 회갑을 축하하는 작은 잔치가 열린다. 5월 8일, 이 땅 모든 어버이들의 사랑에 감사와 축하를 전하는 날, 서울 예수회센타에서는 오기백 신부(골롬반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의 회갑연이 열린다.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 땅에 첫발을 디뎌 노동사목과 빈민사목에 투신했던 선교사 오기백 신부.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사목에 뛰어들 용기와 사랑으로 충만했던 젊은 선교사는 35년 전과는 비교할 수없을 만큼 많이 바뀐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교회의 역할을 찾아 투신할 마음을 다진다.

“세월이 어디로 갔을까요? 놀러 갔다 다시 돌아올 것 같습니다. 너무 빨리 지나간 시간들이 그립고 아쉽기도 합니다. 너무 빨라요.”

1975년 부활 주일에 서품을 받은 그는 곧바로 선교지 한국으로 달려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한국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등 어지러운 한국 사회상으로 인해 선교사의 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고향의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이듬해 1월까지 첫 사목 활동을 했다.

아일랜드 서남쪽 끝 ‘코르크’가 고향인 오기백 신부가 한국에 들어와 처음 활동한 곳도 한반도 서남쪽 목포 지방이었다니 새삼 한국이 인연이란 느낌이 든다고 한다. 흑산도와 목포 등지에서 본당 사목활동을 했던 오기백 신부는 아일랜드로 첫 휴가를 다녀온 후 노동사목에 투신한다. 1970년대 터져나온 동일방직이나 YH 사건 등은 젊은 사제의 시선을 ‘노동’에 꽂히게 하기 충분했다. 광주대교구 주보에 자세히 실린 당시 사건들을 보면서 자신이 이땅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오기백 신부는 30세부터 10년 간 인천교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자기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사람 통해 새롭게 다가오고, 초대해

“하느님은 고통 당하는 이들을 통해 새롭게 다가오고 새롭게 초대해 줍니다. 노동자들은 이 땅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복음을 새롭게 보는 눈이 떠졌지요.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젊은이들을 통해, 아무리 힘들어도 큰 꿈을 갖고 헌신적으로 살려고 하는 이들을 통해, 감옥을 갔다와도 꿈을 버리거나 자기를 바꾸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한국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이미 인천교구 부평에서는 메리놀회에서 노동사목을 펼치고 있었고 오기백 신부는 그곳과 연대해 부천에 노동자의 집을 마련했다. 메리놀회와 인천교구의 지원을 받아 문을 연 부천 노동자의 집은 노동자들이 편하게 와서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편안한 공간,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어린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쉼없이 일하고 있었다. 중학교도 채 나오지 못한 여공들이 의식도 없이, 미래에 대한 설계도 하지 못하고 기계처럼 일하고 있는 현실을 아프게 직시한 오기백 신부는 우선 인간 계발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의식화 교육이었다.

당시 노동 여건으로 그들은 하루 열두시간 이상 예사로 근무했고, 휴일도 한달에 한번 정도에 불과했다. 어린 노동자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자기 계발과 인성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오 신부는 아주 기본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 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친구는 어떻게 사귀며, 내 마음은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사람들은 어떻게 대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프로그램을 통해 가르쳤다.

매주 소그룹 미사를 통해 말씀과 생활 나누기를 했다. 다양한 소그룹들을 만들어 등산, 기타, 노래부르기 등 취미 생활도 할 수 있었다. 목적은 함께 모여 함께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모이고 나누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이런 모임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며 생활 터전인 노동현장을 바꾸어 나가는, 작지만 지치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다.

당시 부천의 소사 천주교회에서 화요일과 목요일 두차례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사전 홍보를 열심히 해도 사회 상황에 따라 교육생들이 모이지 않을 때도 많았다”고 전한 오기백 신부는 개강하는 날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실토한다.

“정말 한 사람도 안왔어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교육 프로그램에 첫 시간에 참여만 하면 그들은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만큼 재미있고 유익했던거죠. 그런데 첫시간에 한 명도 안왔으니......그래도 멈출 수는없었어요. 두달 후에 다시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그땐 20명이 넘게 참석했어요. 교육 첫날 성당에 앉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힘들었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늘 노동자를 기다렸던 신부,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에는 언제나 달려갔던 푸른 눈의 신부. 노동자들이 오면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던 금발의 신부. 오기백 신부와 노동자들은 그렇게 삶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 부천 노동사목에서는 늘 노동자들이 드나들며 집처럼 지내곤 했다.  (사진/한상봉 기자)

노동자의 집 찾는 사람에 대한 검문검색 심해
‘빨갱이의 집’ 소문, 인천교구장 미사 집전으로 불식

하지만 부천 노동자의 집은 이웃과 주위에 ‘빨갱이의 집’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악의적으로 그 말을 퍼트리기도 했다. 당시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는 그런 현실적 어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노동자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웃 주민과 신자들을 초대해 미사를 했고, 나 주교는 강론을 통해 노동사목의 필요성과 노동자의 집의 역할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했다. 그 후 주민들의 곱지 않던 시선이 바뀌었다고 오기백 신부는 회상한다.

“1984년과 85, 86년 노동탄압이 심했어요. 우리 집 바로 앞 골목에서 기관원들이 지켜서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통제했어요. 노동자들이 당연히 오지 못했죠. 그 때 우리집에 프라도회 수녀님 세 분이 있었는데 그들이 수녀들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했어요, 당연히 없다고 했고 수녀들은 곧바로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형사들이 3명의 수녀를 연행한 이 사건은 작은 소요를 불러일으켰고 수녀들의 신원이 확인되자 그들은 노동자의 집에 와서 백배 사죄를 하고 골목 앞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아마 이맘 때 쯤일 겁니다, 어느해 부활을 지내고 미사를 한 후 복음을 나누는데, 그날의 복음이 토마스가 주님의 못자국을 확인해야 믿겠다고 한 내용이었어요. 함께 복음 나누기를 하던 노동자 한 명이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손을 꺼냈습니다. 열여덟살이었던 그는 노동 중 사고로 손가락 3개를 잃었거든요. 그는 늘 그것이 부끄럽고 속상해서 숨겼는데 이제는 예수님처럼 자기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떳떳하게 ‘나의 손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고백이자 부활의 의미였고 부활 체험이었습니다.”

오기백 신부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젊은이의 고백을 듣고 자신도 구체적인 부활의 의미를 느꼈다고 한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소외된 이를 통해 이 땅에 오신다”는 말씀을 노동 사목을 통해 수시로 느꼈고 감사했다는 오기백 신부. 그가 한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사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1992년 봉천동 재개발지에서 빈민사목 시작

1980년 대 격동의 시기에 노동사목에 몸을 담았던 오기백 신부는 1990년에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다. 1992년 한국에 다시 돌아온 오 신부는 서울의 달동네 봉천동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빈민사목을 위해, 봉천동 주민들과 함께 여는 삶의 현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주민들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제관의 문턱은 너무 높을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냥 동네 아저씨로, 한 동네에서 사는 신부로 이것저것 간섭도 하고 간섭을 받으며 살고 싶었어요. 내 나이도 40을 훌쩍 넘겨 이미 아저씨였으니, 동네 아저씨들과 얘기가 잘 통했겠죠?”

재개발을 앞두고 동네 활동가들과 머리를 맞댔다. 천주교도시빈민위원회(천도민) 활동가들과 전략을 짜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오기백 신부는 늘 “이런 삶에서 예수는 누구인가? 나의 구체적 신앙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길을 찾았다.

재개발은 시작됐고 주민대책위도 꾸려졌다. 구청에 가서 협상하는 자리에도, 포크레인이 밀어붙이는 상황에도 오기백 신부는 늘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로, 예수를 마음에 품은 교회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흔히 사람들이 신부가 왜 그 자리에 있느냐고, 시위를 하고, 몸싸움을 하느냐고 합니다. 내가 현장에 있는 것은 교회는 여러분이 행하는 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외침이었지요. 교회가 함께 한다는 증거였습니다.”

현장 활동의 중요함을 온 몸으로 드러낸 오기백 신부. 자유가 없다면 해방도 없다고 말하는 오기백 신부. 자유를 얻고 해방을 이루기 위해 함께 연대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오기백 신부는 부천에서 노동 사제로 청년들과 질풍노도의 삶을 살았다면, 봉천동에서는 동네 주민 아줌마, 아저씨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삶을 풀어냈다.  

▲ 아일랜드에서 오기백 신부를 찾아온 친지들과 함께. (사진/상인숙 기자)

몸으로 현장활동 중요성 보여준 선교사이자 '친구' 

1980년부터 1998년까지 18년 간 그는 사회의 그늘지고 아픈 현장에 몸담고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다. 오 신부는 노동자와 빈민들의 눈을 통해 현실을 보았고, 복음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아는 것은 큰 공부”였다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과 교회를 향해 ‘교회는 무엇인가?’, ‘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제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오기백 신부는 그 후 1998년부터 2004년까지 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을 맡았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선교공부를 하다 올해 다시 지부장을 맡았다. “재활용 시대, 지부장의 재활용”이라고 농담을 던지는 오기백 신부에게서 세월의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젊은 선교사의 열정이 묻어나는듯한 것은 어쩌면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늘 새롭게 건져올리고 나누었던 열정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 온 바로 다음날 한국어 학교에 다녔어요.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것이 참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이내 벽을 느꼈죠, 너무 힘들었고, 또 사람들과 대화도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답답하고 힘들기만 했어요, 외롭고 고통스러웠죠. 나는 한사람의 이방인일 뿐이었고, 소외감이 참 컸어요. 그 때 이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들까 생각했고, 소외된 계층의 어려움과 심정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외국인으로 한국 사회에 참여하면서 숱한 어려움과 한계를 느꼈던 오신부는 그 소외감을 놓치지 않았고, 한국의 비주류 사회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소외되고, 배움으로부터 소외된 자, 말그대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첫걸음은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조용히 말한다.

깊어진 주름도 백발이 된 머리카락도 이 땅에서 살면서 환갑을 맞은 오기백 신부의 열정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는 1980년대 노동현장, 1990년대 빈민현장을 찾아 활동했듯이 2010년대 한국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선교를 위한 새로운 활동을 준비한다.

“한국교회는 200주년을 지내면서 끊임없이 성장했습니댜, 선교지였던 한국교회는 이제 다른 지역에 활발하게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우리 골롬반회는 선교 노하우를 한국교회와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지부장으로서 한국 골롬반회를 이끌어 가는 오기백 신부는 평신도 선교사와 사제 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고 밝힌다. 해외선교사 파견을 위한 교육 활동 외에도 국내에서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 등도 다각도로 개발해 한국교회와 함께하는 골롬반회로 성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오기백 신부는 요 며칠 간 아일랜드 고국에서 자기를 보러 한국에 온 다섯 형제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6남매의 맏이로 신품성사를 받자마자 머나먼 이국 땅으로 떠났던 선교사 오기백 신부는 한국 땅을 찾아온 여동생 넷과 남동생, 그리고 매제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교회를 알리기 위한 일정으로 분주하다. 명동성당과 조계사. 인사동과 용산 전자상가 등지로 나들이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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