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3]

예전에 어느 일간지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읽은 기억이 난다. 최근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건강’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수 년 전에 무주에 있는 대안고등학교에서 한동안 ‘종교와 사회’라는 과목을 맡아서 강의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종교-사회적 의식과 상관없이 제일 큰 소원이 ‘돈을 버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래도 ‘대안’학교 학생들인데, 돈 버는 게 지상목표라니, 참 마음이 답답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상황은 가난한 집안에서나 부유층에서나 마찬가지다.

강남의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강북의 가난한 이들 역시 필사적으로 생계를 돕기 위해서 동동걸음이다. 첨단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새로운 세대들은 어려서부터 ‘돈버는 법’을 부모에게서 배우고, 인터넷/매스컴을 통하여 상술(商術)을 전수받는다. 이들에겐 ‘자발적 가난’이나 ‘청빈’이라는 말이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지 가늠할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지 않고 벌어먹겠다는 교회, 사실은..

▲ <산 위의 유혹>, 두초 1308-11, 템페라화. 평화드림에서 발행하는 <평화와 함께> 2007년 6월호에는 기업영성을 소개하며, "우리의 수익사업이 맘몬이 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면서 "우리가 기업영성 즉 사업을 통한 하느님 나라 확산이라는 '사업선교영성'을 이루어 내려 하고, 또 기존의 자본주의적 기업과는 다른, 교회정신을 담은 사업모델을 찾아 정착시키려 노력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서울대교구가 (주식회사) 평화드림을 만들어 "이제부터는 빌어먹지 않고 벌어먹겠다"는 다짐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 역시 상업주의에서 예외가 아니다. "언제까지 신자들의 헌금에 의존해 교회를 운영하겠느냐"는 말에 감읍할 신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신자들의 헌금과 교무금을 챙기는데 고삐를 늦추고 있지 않으면서, 한편으론 사업체를 통해 돈벌이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의도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은 곧 신자들 역시 '돈벌이'에 온통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신자가 저런 교회를 만든다.

이처럼 세상은 실천적으로 ‘비종교적’으로 바뀌었다. 염치보다는 실리를 챙기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은 ‘그 이상의 것’을 찾는데 인색하다. 종교는 이미 ‘거룩함’의 영역조차 실리를 챙기려는 상인(商人)정신에게 내어주고 있다. 부자들이 구태어 대형매장을 두고 백화점을 찾는 심리를 알아챈 교회는 최고의 고객에게 어울리는 시설을 갖추고, 그들을 중세의 귀족들처럼 배려하고 있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십여 년 동안 지어진 수도권의 성당들은 무늬만 거룩한 채 중세기의 웅장한 성채를 연상시키곤 한다. 일부 성당은 파이프 오르간을 필수품처럼 갖추고, 예술작품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치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른바 한국 교회 역시 '명품성당'을 짓고 싶어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곳에서 '거룩한 전례'를 행하기 위해 사제들은 연중미사에서도 대관식마냥 복사단과 사목위원들을 거느리고 입장한다. 그래서 교회를 알지 못하는 외부인들이 미사에 참례한다면, 아마도 가장행렬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어떤 성당의 경우엔 천장을 노아의 방주모양으로 디자인하였는데, 거창한 샹들리에와 조명 탓에 마치 방주는커녕 우주선 내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SF 공상과학 영화에서 자주 보듯이, 성당 안에서 외계인들이 비밀집회를 여는 장면 같다. 어린 시절 풍금소리에 맞추어 성가를 부르던 소박한 기운은 수도권 안에 있는 교회 안에서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수도권을 벗어나 지역교회로 가면 여전히 교회는 가난하고, 풍금소리 들리고, 성당 안마당에서 아이들이 흙장난하겠지만, 개발과 상업주의 시대에 이 역시 가난한 교구의 슬픈 영상으로 비추어지기 쉽다.

저들만의 천국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집중적 관심 역시 이러한 속물적 자본주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돈이 된다면 뭐든지 팔아치울 기세로 달려드는 세상이 낳은 것은 결정적으로 환경-생태계의 파괴였다. 대부분의 한국민들은 ‘도시’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고, 그 도시란 물과 공기와 흙이 오염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들은 대부분 농약에 찌들린 곡식과 온갖 식품첨가물이 범벅이 된 음식을 먹는다. 아이고 어른이고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져 있고, 정갈한 음료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시민들은 생존경쟁과 부자가 되지 못한 절망감에 싸여있다. “안녕(安寧)하세요!”라는 말 대신에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고 바뀌어 버렸던 인사말은 이들이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절망적인지 잘 알려준다.

사람들의 몸과 영혼에 들어가는 것들이 죄 이 모양이니 당장에 드러나는 결과가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암(癌)이다. 이를 두고 누구의 잘잘못이라고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임을 포기하게 만든다.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모상을 찾을 길이 없다. 그 이상의 것,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탓이다. 단박에 스스로를 ‘성(聖)교회’라고 부르는 종교집단을 떠올리게 되지만, 교회가‘저들만의 천국’을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되지 못한다. 교회는 자본 중심의 세계에 떠있는 대안적 섬이요 빛이요 소금이 아니라, 대체로 자본 중심 세계의 종교적 형태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교회는 질병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제일 먼저 긍정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호스피스 사목’이다. 죽음에 이른 사람에게라도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교구마다 병원을 많이 운영하지만, 가톨릭병원이 유달리 다른 일반 병원보다 복음적이라는 표징은 없다. 지난 2009년 3월 23일 개원한 서울 성모병원은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이전한 백혈병 병동을 축소해 빈축을 샀으며, 하루 입원료가 400만원을 호가하는 초특급 병실을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기사만 봐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1층에 마련된 '럭셔리 병실'은 279㎡(84평)짜리 1개, 79㎡(24평)와 67㎡(20평)짜리 VIP용 2개, 46.28㎡짜리 특실 5개와 23.14㎡짜리 1인실 22개 등이다. 279㎡ 병실은 필요에 따라 185㎡(56평)와 94㎡(28평)로 나눌 수 있다. 279㎡짜리 병실의 하루 입원료는 400만원, 185㎡짜리는 300만원, 79㎡형 VIP 병실은 180만~200만원 선이다. 대회의실과 소회의실을 모두 갖춘 초특급 병실은 고급스런 가족실과 집무실은 물론 욕조와 조리 시설까지 갖췄고, 한강과 남산 타워 등이 한눈에 보인다. 지하로 연결되는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해 사생활 보호와 보안도 강화했다."(스포츠한국 2009년 3월 30일자)

그리고 남아 있는 종교의 영역은 꽃동네, 오순절 마을, 성령세미나 등의 공신력(?)있는 안수기도회뿐 아니라, 이른바 성령의 감화를 듬뿍 받은 뛰어난 개인들에 의한 안수기도다. 이들은 교회-신앙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치병(治病)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다. 질병에 고통받는 이들의 간절한 요구를 담보로 잡고, 이 병자들을 지배하려는 음험한 욕심이 보이고, 성령을 말하며 뒤에서 복채를 챙기는 사제-수도자-평신도 치유자들의 기적행위를 보고 다시 한번 종목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자본의 힘을 느낄 뿐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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